산문의 여유

 

양종균

 

몰래 한 사랑
 
구구절절
쓰고 싶어 펜을 들었다.
 
끝내는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
가슴에 썼다.
 
하고픈 말이
간절하여 전화기를 들었다.
 
끝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가슴속에 묻고 말았다.
 
어느 날이었다. 침을 놓으면서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홈페이지에서 선생님 글을 읽어보고 잔잔한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아직도 사모님을 위해 글을 쓰시다니, 사모님은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시겠습니다. 저 한테도 시 한 편 써주시겠어요?”
“졸작을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군요. 아무튼 독자가 한 사람 생겼군요. 허허, 생각해보리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쿵쿵거려 말을 더듬거렸다.
‘그곳에는 당신을 향해 쓴 글도 많다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이튿날 그녀에게 시 한편을 써주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느낌을 쓴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녀처럼 좋아하며 액자로 만들어 오래오래 간직하겠다고 했다. 김 교감은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돌 정도였다. 그후로도 몇 편의 시를 써주었다.
‘돌아가신 사모님을 그토록 못 잊어 하시다니 ‘순애보’라는 별명이 거짓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느 날인가 그녀가 홈페이지 방문록에 남긴 글에 김 교감은 아내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섭섭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자신이 시를 쓰게 된 것은 아내가 병원에서 암과 투병할 때였다. 병마에 신음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한편 한편 쓴 것이 책을 낼 정도가 되었다.
언젠가는 시집이라도 내겠다는 것이 소박한 꿈이긴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해 아직 그 꿈을 이루진 못했다.
“여보, 내가 한 눈을 판 것이 섭섭하오? 나도 모르겠구려. 하지만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오. 아니 지금도 너무 외롭다오. 아이들이 잘해 주지만 역시 당신만 하겠소?”
아내가 죽은 지도 10여 년이다. 재혼하라는 주변의 권고에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고등학생인 남매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또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들어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은 아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여년간의 교직생활을 때마침 불어닥친 IMF로 힘겨워하는 아들의 사업자금을 마련코자 몇 년 앞당겨 명예퇴직으로 마감하였다. 평생의 직장을 그만두는 아쉬움이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동안 취미 삼아 해왔던 시작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퇴직하고 보니 한 동안 무력감과 공허감이 일시에 몰려와 견딜 수 없었다. 이럴 때면 습관적으로 부모님 산소와 아내의 무덤을 찾곤 했다.
“아버지-, ” “아버님-,“
웬 소린가 했더니 저 앞에서 딸과 며느리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좀 뒤떨어져 두 사람이 오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윤 원장이 아닌가? 김 교감은 너무나 뜻밖인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했다.
“헤, 여기 계실 줄 알았지”
딸 아이가 생글그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님, 놀라셨죠? 저의 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는 후배에요”
“선생님 안녕하셔요? 저 모르시겠어요? 김미진이에요”
그러고 보니 쬎쬎고등학교에서 담임할 때 모범적인 그 학생이었다.
“선생님 우리 엄마 아시죠? 엄마 가까이 오세요”
윤 원장은 수줍음을 띠면서 한 발 들어섰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써준 시를 보고 선생님이 엄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엄마도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고요. 그래서 선배 언니하고 짜고 두 분을…”
“아버지 여기 왜 오셨어요? 엄마한테 미안해서? 엄마도 이해할 거에요”
“히히 내가 좋아했던 순애보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나. 엄마도 말 좀 해요”
“선생님, 사모님을 사랑하신 만큼 저도 사랑해주실 거죠?”
두 뺨에 홍조를 띠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선녀처럼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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