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여유

 

양종균

“여보, 내가 왔소. 오랜만에 온 것 같구려” 김 교감은 잔에 따른 술을 묘 주위로 뿌리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구려. 내가 그동안 잠시 한 눈을 판 것 같소. 내일 모래면 환갑인데 말이오” 김 교감은 허망한 웃음을 지으며 흔히 하는 버릇대로 묘에 기대어 술잔을 기울였다. 추석을 며칠 앞둔 가을 하늘이 유난히도 높고 푸르렀다.
새털구름이던가, 점점이 흩어져 햇볕에 반사된 채 파란 하늘과 대비하여 흰 빛을 더하였다. 푸른하늘, 흰 구름, 저 모두가 김 교감에게는 외로움만 더해 줄 뿐이다. 이제 정말 이 세상에서 혼자 남은 것 같았다. 며칠 전만 해도 또 다른 인생이 있다고 생각했었건만….
“원장 선생님이 결혼하실 모양이야”
“어머, 그래? 누구랑?”
“글쎄, 누군지 모르지만 따님하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어. 아마 따님의 은사님이신가 봐”
“어머, 잘됐다. 아마 교수님이겠지?”
“그렇겠지. 원장님에게는 교수님 정도는 돼야지 제격이지”
김 교감은 물리치료실의 커튼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간호사들의 얘기에 하늘이 무너지는듯 했다. ‘결국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구먼, 그래 언감생심 내 주제에 감히 윤 여사를…’
그는 물리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윤 원장의 상냥한 인사말도 들은 채 않고 황망하게 병원문을 나섰다.
‘그래 이 나이에 사랑이라니, 그것도 짝사랑, 흐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속으로 넋두리를 뱉어 놓았다.
어느날 갑자기 다리가 아파 침이라도 맞을까해서 절뚝거리며 집 가까이에 있는 한의원에 갔었다.
며느리가 후배의 집이라면서 추천하기도 했던 병원이었다.
진료실에서 원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여성을 보면서 그러한 감정을 가져보기에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이외는 처음이었다.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나 중년의 우아한 기품에, 게다가 상냥함은 단순히 직업적인 그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근육이 너무 뭉쳐 있네요.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근육을 푸는 운동을 좀 하셔야겠어요”
그녀는 아픈 부위를 꼭꼭 눌러 주며 말했다.
“별다른 일은 안 하고 그저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 뿐인데”
퇴직 후 그동안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며칠 전부터는 어둔한 실력으로 홈페이지를 만든다고 끙끙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군요.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하체에 근육이 몰려 근육이 뭉칠 수 있으니 적당히 운동을 하시면서 하세요. 하시는 일이 컴퓨터와 관계되는 일인가 보죠?”
“컴퓨터와는 직접 관계가 없고 그저 취미 삼아 글 좀 쓴다고”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아픈 부위가 시원함을 느끼면서 그 손길이 오래 머물기를 기대하며 대답했다
“어머나 글을 쓰신다구요? 어떤 글을 쓰시는데요?”
“별거 아닙니다. 낙서 정도지요”
침 맞고, 찜질하고, 고주파 물리 치료하는 동안 내내 그녀의 모습만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쑥스럽기 그지없으나 그녀의 모습은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그녀가 소재였으며 그녀를 위한 글이었다.
3일째 갔을 때는 오지 않아도 된다는 원장의 말이 서운하기조차 했다. 해서 3일에 한번 꼴로 물리치료를 핑계삼아 병원에 출입했다. 실인즉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따라서 그녀를 보러 가기 위해서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고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은 그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수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 대한 연모의 정은 깊어 갔다. 하지만 그 연모의 정을 그녀에게는 한 마디도 직접 표현하지 못했다. 아니 그 흔한 차 한 잔 하자는 말도 건네 보지 못했다. 오로지 글로서만 컴퓨터 속에 남겨 두었을 뿐이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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