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충효, 청빈에 또 더해 무엇하리-안빈낙도를 노래하다

☞ 지난 호에 이어
1630년(인조 8)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을 받았으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런 곤궁함과 외로움을 달래려고 76세의 노구를 의탁할 곳을 찾아 현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의 궁벽한 냇가 골짝 바위아래 집을 짓고 은거하기도 했다.
산수의 벽癖이 있어서 택했다고 했지만 늘그막에 그런 궁벽한 골짜기로 스스로를 내몬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그곳은 바위 둔덕 가의 산에 핀 꽃들이 비단을 수놓은 듯하고 물가 늘어진 수양버들이 초록 휘장을 친 곳이라고 찬탄하면서 노년을 의탁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그곳에서‘노계가’도 지었다.
그의 생애 전반부는 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에서 두드러지며 후반부에는 향리에서 유가서를 읽으며 안빈낙도를 실천했다. 3권 2책의 ‘노계선생문집’이 전한다. 9편의 가사와 70여 수의 시조를 남겼다. 특히 그의 가사들은 호방한 기운이 넘쳐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꼽힌다.
도계서원 앞에는 노계시비가 있고 뒷면에는 노계의 시조 ‘조홍시가’가 새겨져 있다. 서원 입구 좌측에는 노계가를 새긴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도천리의 나지막한 산자락을 끼고 있는 서원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저수지를 지나면 동쪽 산자락에 노계의 묘소가 나지막한 비석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에는 노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의 문집을 인쇄한 목판각인 ‘박노계집판목集板木. 유형문화재 제68호도 보관돼 있다. 이 목판은 당시의 인쇄문화사 연구자료로서뿐만이 아니라 국문학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서원은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낸다. 영천시는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인 노계 선생과 고려 말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장군, 포은 정몽주 선생을 영천의 3대 선현으로 선정, 유적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임고서원-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시도 기념물 제62호(1985. 10. 15.) 문화재 62호로 지정돼 있으며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에 소재한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해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의 자리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 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박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개성 선죽교에서 살해했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선조 36년에 다시 건립하는 등 곡절이 많았으나 1980년~1999년까지 임고서원 중건 성역사업을 마치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함으로써서원의 기능을 회복했다. 현재 경내는 사우인 문충사, 내삼문인 유정문, 강당인 홍문당, 문루인 영광루, 재인 수성재와 서재인 함육재 등 서원의 규모를 완벽하게 갖췄다. 유물을 보존하는 삼진각과 전사청 등이 있으며 경내에는 포은신도비, 단심가비, 백로가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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