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노계 박인로 선생-도계서원

☞ 지난 호에 이어
그가 지은 오륜가 속에 있는 부자유친가에 그의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아비는 낳으시고 어미는 치옵시니 호천망극이라 갚을 길이 어려우니 대순(大舜)의 종신성효(終身誠孝)도 못다한가 하노라…. 삼천죄악 중에 불효에 더디없다 부자(夫子)의 이 말씀 만고에 대법 삼아 아무리 하우불이(下愚不移)도 미쳐 알게 하렸노라”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등 선유의 유적을 찾아 선현들이 걸어간 길을 답사하며 사상과 덕행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거제도 조라포 만호 때는 청백리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남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642년(인조21)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1701(숙종 33) 그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도천리에 서원을 세워 도계서원이라 칭하고 유생을 교육하고 향사를 올리며 그를 추앙하게 됐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70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도계서원 경내와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 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앞.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에 그의 시비가, 도계서원 옆에 노계시비 그리고 부산 민락공원 무궁화동산에 가사비, 경주시 산내면에 노계유적비가 세워져 그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경모하고 있다.

◈충효, 청빈에 또 더해 무엇하리-안빈낙도를 노래하다

군대소리 진동하여/ 산악을 흔드는 듯// 섬 오랑캐 백만이 일조에 충돌하여/ 억조의 놀란 혼들 칼 빛을 좋아하니/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아 있고/ 웅도와 큰 고을은/ 승냥이와 여우의 소굴이 되었더니/ (중략)/ 우연히 때가 와서 제갈량을 다시 만나/ 오덕(五德) 밝은 장수 밑에서 앞장선 군대가 되었다가/ 영웅과 인용들을 전하는 재상에 끼게 되었으니/ 남방이 편안하고 장사 군마 강하더니/ 왕조 하룻밤에 큰바람(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니/ 용 같은 장수와 구름 같은 용사들이/ 깃발을 하늘 덮고 만 리나 이어졌으니/ 군대소리 크게 진동하여 산악을 흔드는 듯/ 어영청 대장은 선봉을 인도하여/ 적진 중에 돌격하니 모진 바람 큰 비에 벼락 쏟아지듯…이하 생략

“참으로 언술이 적절하고 간절하면서 시원시원하오. 역시 그대는 시가에 천부의 재질을 지녔다고 해야겠소. 이 노래를 장병들은 물론, 백성들이 불러서 그때의 참상을 잊지 않고, 마음을 다잡게 해야겠소”
성윤문은 박인로의 어깨를 치면서 칭찬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장에서 투신한 경험을 살려 그려낸 태평사(太平詞)를 두고 한 말이었다.
‘태평사’는 우리 민족의 순박한 풍속을 드러내면서 두 차례 외적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 물리치고 태평성대를 누리자는 염원을 담은 웅건하면서도 기상이 넘치는 가사다. 박인로가 처음 가사를 써본 것인데 성윤문이 대번에 그 재주를 알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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