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도 종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인류애로 울린다. 어딘가의 한 모서리에 서 있어도 나를 위해 울리고 너를 위해 울린다. 키스를 할 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느냐 오른쪽으로 돌리느냐는 게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마리아는 조던에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도 내가 우리 둘의 몫만큼 사랑하겠어요. 마리아는 절규하며 멀어져가고, 총에 맞은 조던은 서서히 죽어간다. 누구의 말마따나 사랑은 풍덩 빠지기도 하고 천천히 물들기도 하지만, 아픔을 동반하는 신의 그물에 걸려 뒤집어져 허우적거리는 물방게가 사랑이다.
마리아역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물이 별빛으로 반짝인다.
꽃보다 아름답고 별처럼 순수한 여인, 사랑만이 운명이었던 여인 테스도 스크린으로 살아나면 클래식이 되질 않던가.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영화 ‘닥터 지바고’는 역사의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도는 지바고와 라라의 비극적인 사랑을 주제로 영상에 담은 대서사시다. 끝없이 펼쳐지는 하얀 설원 속에 운명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울림은 설원보다 더 하얗다. 사랑은 애련하고 눈물이어라.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가 그렇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그렇다.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처음 배우는 사랑,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 깨닫게 되는 사랑. 그러고 보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공간을 채우는 게 사랑인가보다.
이 지상에서 언제든지 성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하게 선택된 포유류. 이 지상에서 가장 섹스 기교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인간. 그래서 품위 있는 불륜이 있고, 예의바른 간통이 있고, 마조히즘이 있고, 사디즘이 있고, 롤리타 신드롬이 있나보다.
20세기 문학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첫 문장은 이렇다.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40세의 험버트와 12세 소녀 롤리타와의 사랑이야기가 광기일까, 집착일까. 환희와 절망이 빚어내는 숨 막히는 언어의 유희가 문학이 되고 영화가 되니, 사랑에는 운명을 거스르는 끌림이 있고 힘이 있나보다.
프랑스 여인 루실과 독일 장교 브루노가 심장이 터질 듯한 러브스토리로 펼쳐지는 영화 ‘스윗 프랑세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한 ‘이렌 네미로프스키’의 작품이랬지. 
탱고의 역사를 바꾼 전설의 두 연인 리고와 코페스가 사랑 70년, 무대 50년이라도 끝내는 각자의 길을 가는 영화 ‘라스트 탱고’가 탱고는 완벽해도 삶은 탱고보다 어렵다는 걸 나는 배운다.
천재시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숨겨졌던 러브스토리라는 ‘연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매와의 삼각관계다. 언니 캐롤린과 동생 샬롯, 그리고 쉴러,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도 시작되는 게 사랑이다.
수많은 연인들의 영화를 보라. 로슈포로의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라벤더의 연인들, 아름다운 연인들….
기억이 지워진 남자와 사랑을 하는 ‘나를 잊지 말아요’도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니, 사랑이 존재하는 한 연인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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