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야생화라는 이름으로

▲ 흰노루귀(Hepatica asiatica Nakai, 영흥도)

경칩이 지나면서 지인들로부터 봄소식이 왔다. 통도사 홍매화는 우수에 벌써 꽃망울을 터뜨려 단청을 물들인다. 복수초는 눈 속에서도 노랗게 꽃대를 올렸다. 많은 눈이 내린 제주도에는 그곳에만 자생하는 세복수초가 얼었던 대지를 헤치며 활짝 피었고 변산바람꽃도 일찍 숲속 봄을 알린다. 영암 월출산의 봄소식과 함께 고흥 봉래산 복수초와 노루귀- 내장산의 붉은대극, 변산바람꽃, 큰괭이밥- 무등산의 꿩의바람꽃, 괭이눈, 산자고- 영광 불갑산의 만주바람꽃, 중의무룻, 흰털괭이눈, 연복초가 차례로 봄 길에 있다. 안면도의 지인은 소도의 섬 구릉에 그득 피운 산자고 소식과 남양주 천마산에서는 너도바람꽃이 앉은부채 사진과 함께 카톡으로도 전송돼 온다.

▲ 복수초(Adonis amurensis Regel & Radde) (영흥도. 국사봉)

이른 봄을 대표하는 야생화는 복수초를 선두로 전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바람꽃속과 노루귀가 대표적이다.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흔들. 얼음이 녹지 않은 추운 날씨의 동토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의 꽃들이다. 산지에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운 복수초는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 핀다고 하여 ‘얼음새꽃’이라고도 불린다.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눈색이꽃’이라고도 부른다. 속명은 “아도니스(Adonis)”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소년 아도니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저승의 여신 페르세포네 두 여인으로부터 동시에 사랑을 받는다. 어느 날 산에서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물려 피를 흘리며 쓰러지니 그곳에서 복수초가 피었다.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반년은 지상에서 아프로디테와 함께 살고, 반년은 지하에서 페르세포네와 함께 살도록 허락했다. 그래서인지 복수초는 2~4월까지 꽃을 피우고 6월이면 열매를 맺어 잎을 지우고 다음해 꽃을 피우기까지 기나긴 잠을 잔다. 복수초(福壽草)는 황금색 술잔과 비슷해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복과 장수,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으로 여겨졌다.

▲ 꿩의바람꽃(Anemone raddeana Regel) (화야산)

바람꽃의 속명은 아네모네이다. ‘windflower’라는 영어 이름은 그리스어인 ‘Anemone’에서 온 것으로 꽃이 바람이 불면 활짝 핀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은 짧은 봄날을 연상시킨다. 한국에는 약 13종의 바람꽃속 식물이 자라는데 이 중 꿩의바람꽃과 한국 고유종인 홀아비바람꽃을 많이 볼 수 있다. 같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지만 바람꽃속이 아닌 식물에 ‘바람꽃’이란 이름이 붙은 종류도 많다. 너도바람꽃·나도바람꽃·만주바람꽃·매화바람꽃 등이 이에 속한다. 변산바람꽃은 변산에서 처음 발견 되어 Eranthis byunsanensis B.Y.Sun 이라는 학명을 얻었다. 바람꽃들은 초록색 잎에 하얀 꽃잎들이 대비되어 산기슭에서 바람 속에 한들한들 싱그러운 봄을 예고한다.
낙엽을 헤치며 나오는 노루귀는 싹이 나올 때 약간 말려 있는 모양새가 마치 노루의 귀와 비슷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흰색, 분홍색, 청색으로도 피며 어린잎과 잎자루에 하얀 털이 복스럽게 나 있어 햇살을 받아 뽀얗게 비쳐 앙증맞다.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여린 잎자루를 털이 보호하는 까닭일 것이다.


원초적 관능의 색깔들

▲ 분홍노루귀(Hepatica asiatica Nakai, 영흥도)

이른 봄의 야생화들은 키가 너무 작아 발밑을 보아야 한다. 엎드려 눈높이를 맞추면 꽃들이 얼마나 오묘하고 예쁜지 알 수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꽃 속에는 하늘도 있고 눈이 내리는 산기슭도 있다. 십여 년 전 한창 산으로 다니던 시절 시 한편을 접했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다 그랬습니다 /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김선우 시인의 얼레지라는 시는 내게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연분홍으로 붉게 물들던 얼레지꽃은 연인산 우정능선과 화야산 계곡 가장자리를 빼곡히 덮으며 맑은 물가에 나를 가두어 두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벌과 나비를 불러 씨를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그렇게 분화돼 온 원초적 관능의 빛깔이겠지.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다. 명지산, 지리산, 완도 백운봉 산길에서도 얼레지를 보면 따뜻한 봄 날 치마를 홀딱 뒤집어 쓴 여인네를 보는 것만 같아 가는 길 내내 눈길 주느라 바쁘다. 이른 봄꽃들은 서늘한 가슴이 괜스레 마음 설레며 따스한 봄 볕 같아져 사랑스럽다. 창 넘어 풍경은 뚝섬역에서 오가는 전철이 높은 선로를 따라 햇살 맑은 오후를 달린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지나면 가랑잎, 덤불 속에서 움트는 꽃망울들. 서해안 꽃 섬 풍도로 가는 뱃길을 예약한다. 쌉싸름한 달래무침과 사생이(바디)나물 향긋한 봄 밥상에 풍도바람꽃이 봄을 재촉할 산길이 그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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