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생기를 품고 만삭이 돼 끙끙 앓던 대지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구정이 지났으니 땅속에 머물던 생기가 지표 위로 올라오고 그 기운을 받은 식물은 발빠르게 새순을 틔운다. 매화 소식을 앞세워 복수초로 이어지며 아파트의 발코니 꽃밭소식까지 카톡방에 사진이 연속으로 올라온다. 
나에게 봄은 감기란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오지 못하는가 싶더니 기다리는 줄 알고 찾아왔다. 지독하게 앓고 일어나 명일동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수필교실에 갔다. 거기에서 봄을 만났다. 겨우내 출간되길 기다리던 한 회원의 ‘논어’책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3년 동안 매주 논어를 한두 편씩 해제해오던 중도 장애인 회원 K,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알리고 싶지 않으면 그 자유를 보장해주면 된다. 교실을 찾아온 사람, 결석하지 않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수업 내용 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신뢰를 구축하는 것과 인간애에 대해 스스로 확인하도록 돕는 일이다.
한참 일하다가 병으로 중도 장애를 입고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한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아픔이다. 불편한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사회에서 외진 길을 걸어야 하며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비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 여파로 비관이 커지면서 불만이 쌓여가다 보면 다분히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 그 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어도 불멘 소리를 다 들어줄 수는 있다. 글과 그림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돕고 숨은 기능을 꺼내주고 뇌기능의 재활을 자연스럽게 돕는다.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은 그 시점에 매몰돼 있으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에 되돌릴 수 없는 일로 세상에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잃어버린 몸에 대해 원망도 하지 말고, 매주 가진 실력으로 논어를 한두 편 해제해오면 수업은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 교실을 얼마나 진정성을 담고 다니는지를 알기에 내 말을 들어줬다. 매주 학습자료용 원고를 마련해왔고 그 회원 덕분에 나는 3년 동안 주기적으로 논어를 접하는 행운을 얻었다. 티끌모아 태산, 나는 일년에 한번 문집을 내는데 그 회원에게 논어 꼭지를 배당했다. 놀라운 변화는 시작됐다. 차별화를 해줄 이유가 되어 그리 했다.
적중했다. 몸은 크나 내면은 한없이 초라하던 그 회원의 내면화가 바뀌었다.  닫힌 가슴이 열리자 손톱 만하게 그리던 사람 대신 도화지를 꽉 채울 정도로 힘찬 나무 한 그루를 펼쳐냈다. 내면의 존재감이 커진 것이다.
어느 날 보니 그의 어투가 변했다. 표정도 변했다. 침튀기며 불만을 토로하던 습관도 줄었다. 누군가는 비관해 술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아무리 힘을 실어준다고 불편한 몸으로 인문서 한 권을 출간할 만큼의 저력이라면 불편해진 현실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출판을 권유했다.
혼자서 용기를 내어 진행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힘을 실어주고 가치를 부여해주고 그렇게 용기를 부어줘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모자라서 그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가 있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므로 나는 당당하게 그에게 맞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처로부터 아직 온전히 탈출하지 못했다. 책 날개에 자신의 이력을 밝히지 않았다. 저자 이름도 필명으로 처리했다. 자신을 확인한다는 게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를 몰라서 놓쳤다. 책 한 권을, 내게서 죽어나가는 세포들의 모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세상에 논어책이 없어서 못볼 사람은 없다. 책을 내면서 한 사람이 움츠렸던 자신의 허물을 벗는 인간승리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못보여 줘서 조금 아쉽다.  
나는 봄 가운데서 축하식도 하고, 다른 문학교실로 초대해 저자특강을 들을 참이다. 죽은 줄 알고 방치해둔 발코니의 화분에서 싱싱하고 커다란 꽃송이를 만난 듯 행복하다. 지금의 나는 생산하는 시기가 아니라 보람을 안아야 하는 시기이므로 그가 ‘맹자’를 시작했다니 다시 희망을 가져본다. 누군가에게서 새 희망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체험인지 그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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