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도 나의 전부였던 내 아들을 잃고 복수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능은 생존이다. 생매장된 죽음의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기적 같은 생존기는 실화라고 한다. 회색곰과의 치열한 사투로 사경을 헤매는 30분은 대사 없는 디카프리오의 혈투다. 광활하게 펼쳐지는 무채색의 땅과 하늘과 강, 추위와 기아와 싸우면서 4,000㎞가 넘는 기나긴 여정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야 할 길이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생존의 이유는 생존 자체가 이유일지도 모른다.
절박하고 다급할 때 생존 이외는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섭씨 영하 30도의 강물에 뛰어들고 소의 생간을 뜯어 먹으며 피의 대가, 반드시 치르고 말 것이라는 디카프리오의 들숨과 날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거대하고 웅장한 대자연 속에 최고의 배우들이 펼치는 압도적인 열연은 차가운 겨울영상미학이 된다. 전설이 된 한 남자의 위대한 이야기는 결코 레버넌트라는 망령이 아니다. 한계를 버텨내고 이겨낸 산 자는, 천당이나 극락이 서쪽 하늘에 있질 않고 사바에 있다는 걸 가르쳐준다.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 위대한 개츠비 등에서 사랑을 펼쳤던 디카프리오. 다크 나이트의 스케일과 매트릭스의 미래가 만났다는 ‘인셉션’, 탈출 불가능의 섬에서 누군가 사라졌다는 ‘셔터 아일랜드’, 유쾌한 한탕이었다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최초의 악역이라고 하는 ‘장고: 분노의 추격자’ 등 감정의 연금술사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명품배우라 해도 감독의 빼어난 연출력이 없으면 바다가 없는 한낱 몽돌인 것을.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스텝들이 있어 노을이 아름답다.
칼릴지브란의 말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본다면.
155분을 숨막히게 하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는 감독이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다.
영화 ‘클라라’는 음악과 사랑 이야기다. 슈만과 클라라와 브람스가 어떻게 음악으로 사랑을 하며 동행을 했는지, 노을 저쪽으로 사라져 가는 구름마저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나에게 음악은 인생이었고 사랑은 운명이었다는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가 사랑한 클라라는 위대한 뮤즈다. 뮤즈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으로 춤과 노래, 음악, 연극, 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재능과 영감을 불어넣는 걸 말한다고 한단다. 뮤지움(museum)이라는 미술관, 뮤직(music)이라는 음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단다.
클래식 역사상 스캔들이 아닌 가장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클라라와 슈만과 브람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내가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 브람스는 바라보기만 하는 지고지순의 사랑에 얼마나 아파했을까. 바람이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큰 불은 번진다고 하는데, 그 활활 타오르며 번지는 사랑을 어떻게 견디며 버티었을까. 수밀도의 가슴을 향해 숨이 가쁘고 침이 마른 육체의 욕망을 자제하는 걸, 순수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플라토닉 러브는 너무 잔인하다. 침실은 저만치 있는데 다가설 수 없어 더욱 반짝이는 새벽별을 누가 아름답다 했던가. 브람스의 자장가는 1년에 세 번 이상 듣지 말라고 한다. 너무 달콤해서 뼈가 녹을 염려가 있단다.
미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문정희의 시 ‘치마’는 벗을수록 더 위대하다는 것이었고, 나체를 드러낸 고급 창부 ‘프리네의 재판’은 무죄였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법이 접근하기 어렵고 신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란다.
질풍노도의 순수한 사랑 베르테르도, 로테는 저만치 두고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니 슬퍼서 영혼을 뒤흔드는 낭만주의가 탄생했으리라.
귓가를 사로잡는 달콤한 선율, 입술을 사로잡는 달콤한 꿀맛,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인지라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미국 시인 매클리쉬는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나보다. 시와 사랑은 이성과 논리로 해독되는 암호문이 아니고, 시와 사랑은 표현으로 설명되지 않은 것을. 심장이 떡방아를 찧고 맥박이 호박죽을 끓이는 저 사랑을 어찌 지상의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9살이나 많은 슈만에게는 남편이라는 사랑으로, 16살이나 연하인 브람스에게는 모성적인 우정으로, 두 사람의 위대한 작곡가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요 주역으로 ‘클라라’가 영화로 펼쳐져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