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여유

 

양종균 주택관리사

박 교수는 약속시간보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종업원이 갖다 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나타날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어제 느닷없는 전화 한 통화가 박 교수를 매우 설레게 만든 것이다.
“선생님이 쬎쬎신문에 쓰신 첫사랑이란 글에 대해서 취재하고 싶은데요”
모 여성지의 기자라면서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박 교수는 다시 한번 한 모금의 물을 마시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몹시 추운 겨울밤이었다. 대합실에서 초조히 그녀를 기다렸건만 그녀는 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엊그제 그렇게도 철석같이 약속했건만 결국 그녀는 부모님의 생각대로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문학도와는 인생을 함께 하기엔 자신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도망치자고 먼저 제안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배신감과 비참함이 함께 몰려왔다. 혼자서 기차에 몸을 싣고는 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그리고는 그녀에게 복수할 것도 다짐했다. ‘꼭 성공하리다. 그리하여 당신을 다시 찾으리다. 그때는 당신이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어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영세한 문학 잡지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남보다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이제는 중견 작가로서, 대학교수로서 나름대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복수심은 세월과 함께 엷어지면서 이제는 한낮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며칠 전 고향의 신문사에서 첫사랑이란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되새겨 보았던 것이다. 물론 복수를 하겠다는 다짐도, 그리고 그 다짐이 세월과 함께 엷어졌다는 내용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녀도 누군가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박 교수님이시죠?” 박 교수는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젖었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앳되게 보이는 아가씨가 마주 서 있었다. 간단한 악수 인사를 나누고는 마주 앉았다.
“그래, 박 기자라 했던가요? 나에게 어떤 걸 묻고 싶소?”
“글쎄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저 첫사랑에 대해서 가십거리나 얻을까 해서요”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무언가 어색함이 드리워져 있음을 박 교수는 느낄 수 있었다
“가십거리라, 허허 내 첫사랑의 여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죠?”
“예. 사실 무척 궁금해요”
“어~. 나도 그 여인이 어디에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왜죠? 그 여인이 배신했기 때문인가요?”
“약간은 그런 면도 있겠지요”
“교수님은 그녀에게 아직도 복수하고 싶으신 것 아니신가요?”
“허. 기자님이라서 그런지 너무 직설적이네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배신이 그녀의 의지였을까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나는 그녀의 의지든 타의든 개의치 않아요. 배신 그 자체가 나에게는 중요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상관없지요. 그저 하나의 쓰라린 추억이라고만 생각할 뿐인 걸”
“지난번 글에서는 복수심이 많이 엷어졌다고 쓰셨는데…”
“물론이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배신과 복수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다녔지요. 그러나 늦게나마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그리고 자식을 낳고 살다 보니 그 단어들이 내 곁에서 서서히 멀어집디다.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운 복수가 아닐는지 모르지요, 허허”
“그 여인을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니” 박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죠?”
“아마 그녀를 본다면 그동안 아물고 있던 내 마음의 상처가 덧날 것 같기 때문이요”
“그녀가 용서를 빌어도 말입니까?”
“용서를 빈다면 용서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덧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 상처를 달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어요”
“흔히들 첫사랑을 얘기할 때는 감미롭게 들리는데…”
“허허, 나도 역에서 기다릴 동안은 감미로웠지요”
“그렇게 사랑을 굳게 맹세한 분이었는데 배신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군요.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귀한 시간을 내주셔 감사합니다”
며칠 후 박 교수는 발신자가 없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한 여인이 있었지요. 그녀는 한 남자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부모를 배신하면서까지 그 남자와 멀리 도망가기로 했답니다. 약속한 그날 그녀는 너무 서두르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지요. 의식을 찾았을 때는 병원이었고 그녀는 목숨 대신 한 쪽 다리를 포기해야만 했답니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구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불행을 감수하는 여인으로 살기로 했답니다. 한 남자를 사랑한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25년 동안 숨어 지내며 그 사랑을 후회하기는커녕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잘되기만 기도했답니다. 새로운 생명이었던 그 여인의 딸아이는 어머니가 한 남자의 글들을 애지중지 집착하는 것에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딸이 아버지를 찾겠다고 했을 때도 단란한 가정에 풍파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며 말리셨던 여인이었답니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쓴 글에서 배신이라는 단어를 보며 한 없이 울기만 하는 그 여인을 보다 못한 딸은 그 남자를 만나러 서울까지 갔었지만 끝내 그 여인의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그 딸아이도 그분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여인의 억울함만은 꼭 풀어드리고 싶기에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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