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창경궁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1418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 살아 계신 상왕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지었다. 그후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성종 14년(1483)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을 지어 궁궐의 규모를 넓히고 창경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던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순조 30년(1830)에 또 큰 화재로 많은 궁궐 건물이 불에 타 버렸던 것을 순조 34년(1834)에 대부분 다시 지었으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명정문, 홍화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이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일제는 순종 융희 3년(1909)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했다. 1911년에는 일제가 궁 안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동·식물원을 포함해 창경원(昌慶苑)이라 이름을 고쳐 그 격을 떨어뜨렸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창경원에 가서 어린이놀이터나 동물원 벚꽃놀이 등을 함께 즐겼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냥 김밥에 사이다, 과자만 준비하면 최고의 나들이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행복이란 것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부족할 때 잘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달리 마음에 욕심을 부릴 만큼의 경제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의 여유에도 마음이 즐거워지기만 하던 것은 마음을 비워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생각이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1983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중창공사를 했다.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로잡고 궁 안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시설을 철거했다. 그리고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 등을 다시 지으면서 남아 있던 궁전들을 보수하고 조경공사를 해 왕궁으로서의 옛 모습을 되살렸다.

◈홍화문과 외행각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제384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1616년에 다시 세워진 이 문 앞에서 국왕이 일반 백성들을 친히 만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왕실 언덕인 함춘원에 활터를 세워 무과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규모는 3칸 대문이지만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궐(闕)’이라는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췄다.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玉川橋, 보물 386호)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이 마당을 둘러 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했다.

◈명정전
국보 제226호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이다.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이곳은 임금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렀던 곳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돼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2층) 큰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데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당초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어진 궁궐이 아니라 왕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앞마당은 행각이 둘러싸고 있으며 출입문인 명정문도 보물 제386호로 지정돼 있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