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속에는 욕계와 색계, 무색계까지 있다.
얽히고설키는 천태만상의 영화가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을 위한 과학’이라는 책을 보면 생존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력이 사랑이라 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감정이니, 영화 속에서 울고 웃고 분노하는 감정이 나를 성숙시키는 아바타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깨달으면 철학이 된다 했던가. 현대과학이 말하는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테스토스테론 등의 사랑의 호르몬만을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으리라. 
알랭바디우의 ‘사랑예찬’이거나 롱펠로우의 ‘인생예찬’도 나는 잘 모른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리 큰 대형 스크린이라 해도 숨을 곳이 없고,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에 종종걸음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칼을 빼들고, 총을 쏘는 영화. 영화에는 휴머니즘이라는 실존철학이 있다. 신보다 인간의 양심을 믿는다는 키에르케고르가 있고, 평생 신을 잘 들먹이지 않았다는 야스퍼스도 있다. 플라톤은 ‘사람은 사랑할 때 시인이 된다’고 했으니 영화가 그렇다. 사랑이 위험하고 미친 짓이라 해도 주인공은 한밤중에도 달려가니 움직이는 영화에는 행동하는 니체가 있고 까뮈가 있고 하이데거가 있다.
합리주의라는 스피노자도 칸트도 있지만, 모든 행복은 사랑 때문에 모든 불행도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고 영화가 암시를 하며 펼쳐진다. 어쩌면 영화가 복잡한 현대인에게 해독제가 되고 카타르시스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대형 스크린에서 배우들이 내뿜는 열연은 때로는 통쾌함을,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며 나의 감성을 붙잡아 주고 일깨워 주는 게 좋다. 쫓고 쫓기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이루어 내는 007시리즈 24번째의 ‘007스펙터’가 후련하다. 숨 돌릴 새가 없는 로마에서의 추격전, 오스트리아 솔덴 산에서 설원을 누비는 추격전은 본드와 악당의 싸움은 제쳐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짜릿하다. 영화의 묘미는 내용보다는 시각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살아가는 일처럼 그 마지막 반전을 위하여 주인공은 지옥을 들락거리면서도 방아쇠는 아껴둔다.
멜빌의 걸작 백경을 탄생시킨 에식스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하트 오브 더 씨’는 생존자 니커슨의 진실고백이다. 길이 30m, 무게 80톤의 향유고래와 94일간의 표류, 21명의 조난자와 7,200㎞의 망망대해 남태평양을 배경으로 압도적인 스케일을 스크린에 담은 영화다.
238톤의 배가 단 10분 만에 침몰하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성난 파도에 부딪히고 거친 폭풍우에 찢겨진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력하고 초라하기만 한 인간이, 오늘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는 건 무슨 이유일까. 희망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 고래사냥이라는 탐욕을 버렸다면 어찌 순한 향유고래가 공격을 하랴. 우리는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자연과도 동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재앙으로 침몰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욕심으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단다. 이러다간 화가 난 고래보다 더 큰 화가 닥칠지도 모른다.
시편 8장 4절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말씀이 있지만 언제까지 신은 사람을 사랑해줄지 모른다.
하버드대학 철학과 에머슨 홀 현관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은 사람을 이토록 생각해주십니까’란 문구에 유효기간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하면 서둘러 심판이 있을지도 모르리라.
고래와의 대치보다도 더 위험한 대치들이 경계선을 무너뜨리며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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