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환갑이 지난 C과장은 50을 훨씬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입사했다. 공고출신인 그는 고3 겨울방학 때부터 가스보일러와 가스레인지를 생산하는 기업체에 들어가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만 일하다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아내는 퇴직금으로 작은 가게를 하면 어떨까 제안했지만 장사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 C과장은 여기저기 일자리를 부탁한 끝에 아파트 단지의 기전기사로 입사하게 됐다.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선을 다해 일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파트 일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는 분명 각종 기계설비들을 관리하는 업무로 알고 입사했는데 다른 일이 더 많았다. 봄이 오면 봄맞이 화단갈이와 지하주차장 대청소를 하고 여름엔 매주 분수대를 청소했다. 가을엔 가지치기와 가을 꽃 갈이를 하고 겨울엔 눈치우고 염화칼슘 뿌리기, 수도계량기 동파가구 방문수리가 뒤따랐다. 경비원들과 함께 음식물쓰레기통 정리, 재활용터 관리도 했다.
동대표들은 집안 전등을 갈거나 변기가 막혔을 때도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관리사무소의 업무는 분명 ‘공용부분’을 관리하는 것이지만 사적인 부름에도 달려가야 했다. 도움을 받은 입주민이 음료수라도 건네려 했을 때 그는 굳은 표정으로 “기사는 공적 업무가 있으니 다음부턴 이런 일로 관리소에 전화하지 마시라”고 말하곤 곧바로 나와 버렸다. 그는 곧 ‘말 안 듣고 뻣뻣하며 건방진 기사’로 정평이 났다. 점차 주변과 마찰을 빚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그가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허리만 아픈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안면근육이 마비될 정도로 신경이 손상된 걸 알았다. 적어도 3개월의 입원과 지속적인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와 하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내도 “일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은퇴하고 공공근로 다니며 용돈이나 벌어 쓰자”고 위로했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의 반응이 의외였다. 관리소장과 가끔 잔 집안일을 시켜 그가 매우 싫어했던 입대의 회장이 입주민과 동대표들을 설득해 치료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 임시직 기사를 쓰기로 결의했다. 깐깐하고 무뚝뚝하지만 매사에 꼼꼼하고 치밀하게 기계설비를 관리하는 그를 소장과 회장은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전과장’ 타이틀까지 달고 화려하게 복귀한 그는 지금도 매우 성실하고 건방지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파트 기사라면 누구나 주택관리사 자격증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데, 소장이 회의시간에 들어가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나서 바로 마음을 접었다”고 할 만큼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그의 책임감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J과장은 대학을 중퇴했다. 정확히는 제적당했다. 지방출신으로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대학에 입학한 그는 곧바로 학생운동에 투신해 열심히 활동하다가 ‘잘려’ 버렸다. 이후 위장취업으로 공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후배인 아내를 만나 살림을 꾸리고 아기도 낳으면서 험난한 ‘활동가’의 길을 마무리했다. 그 후 처남과 함께 제과회사 대리점을 운영했으나 경기불황으로 실패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입사했다. 결혼 후 돈벌이에 무능한 남편이었지만 아내는 돈 문제로 불평한 적이 없었다. 사범대를 나온 아내는 기간제 교사로 여러 학교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가끔 뉴스에 기간제 교사들의 ‘수난’ 보도가 나올 때마다 J과장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눈물을 삼킨다. 그들 부부는 현재 ‘열공’중이다. 남편은 주택관리사 시험을, 아내는 교원임용고사를 준비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차가운 겨울, 뜨겁게 살아가는 C과장과 J과장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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