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온갖 진실이, 온갖 정의가, 온갖 사랑이 범람하는 이 황홀한 시대에 죽림칠현이 무슨 애국이 되랴.
나는 그저 대숲에서 부는 바람이 좋고, 사이사이 햇살이 좋고, 언뜻 언뜻 하늘이 좋고, 느릿느릿 걷는 게 좋다. 대숲이 내뿜는 향기는 그냥 코로서의 향기가 아니다. 모든 걸 품어주어 안식처가 되는 어머니의  향기이다. 그래서 그 옛날 임금님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이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그 엄청난 비밀을 털어 놓았나 보다. 신라 48대 왕인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대숲이 없었다면 우리는 알지 못했으리라.
이발사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귀가 크다는 것도 대나무의 피리소리가 알려 주었다고 하질 않던가.
내림굿을 받은 처녀무당의 집 앞에 대나무 하나가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서 있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지만 대나무는 보통의 나무가 아니다. 나물로도 해먹고 초장에 찍어 회로도 먹는 다년생 풀이 ‘대’다. 죽순이라는 풀이 마디마디가 생기며 키가 큰 나무가 되니 이름 하여 대나무다. 풀이 시련을 견디며 나무가 되었으니 그 효용가치가 얼마나 많을꼬.
지난 여름의 그 무덥든 밤에는 죽부인으로 가슴을 파고들고, 대나무 숯은 천연공기방향제로 탈취, 정화, 습도조절에 좋고 죽로차(竹露茶)는 항암효과에 좋으며 죽염은 잇몸치료에도 좋다니 대나무의 효능은 무궁무진이다.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아 소쿠리가 되고 광주리가 되고 채반이 된다.
때로는 젓가락으로, 때로는 부채로, 때로는 낚시대로, 빽빽하고 촘촘하면 참빗이 되고, 보일 듯 말 듯 하면 수렴청정의 주렴이 되고, 드물어도 들어오면 다 잡히는 국경수비대의 죽방렴이 된다. 골짜기처럼 애절한 사연은 세로로 퉁소가 되고 단소가 되고, 저 멀리 떠난 님을 향해 한없이 가슴을 도려내는 사연은 가로로 대금이 되고 중금이 되고 소금이 된다. 만 가지의 고통과 파란을 치유하고 물리치고 쉬게 하는 종합병원의 처방전이, 그 옛날에는 대나무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아니었던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에도, 월남전의 고엽제에도 살아 남았다는 대나무. 생명을 연장하려고 응급실에도 요양원에도 가질 않고, 한 번 꽃을 피우면 미련 없이 반드시 죽는다는 대나무. 태화강대공원 대나무 생태원에는 한국 4종, 중국 24종, 일본 35종이라는 키 작은 대나무가 표본으로 있지만 600속 10,000여종이 넘는 대나무가 세계 곳곳에 있어 지구는 아름답나보다.
눈을 감되 잠들지 않고, 햇볕을 받되 바래지 않고, 비에 젖어도 물들지 않고, 바람에도 붙잡히지 않고, 뭘 가지려 하질 않아 세월의 파도에도 흔들리기만 할 뿐 꺾이지 않는 대나무.
어머니인 태화강의 젓줄을 물고 새근새근 잠든 십리대숲을 깨울까봐 발소리 죽이며 나는 떠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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