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창덕궁 탄생의 역사적 배경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건됐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이궁의 양궐 체제가 된다.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 세로 273㎝의 큰 그림. 열여섯 폭의 비단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모두 활용해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궁중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각 건물의 이름도 기재해 궁궐 연구와 복원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동궐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을 기록한 그림으로 예전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다.
◈돈화문(敦化門) 일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됐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樓閣)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둬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췄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됐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돼 있다.
◈금천교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했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1411년(태종 11) 금천에 다리를 놨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해 ‘금천교’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됐다.
◈아무나 칠 수 없었던 신문고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進善門)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리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놨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해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