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강은 늘 기적을 만든다. 강은 공존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서울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울산엔 태화강의 기적이 있다. 강은 도시를 만나면 도시와의 기적을 만들고, 자연을 만나면 자연과의 기적을 이룬다.
강은 생명이다. 존재하는 것들의 생명을 보듬고 햇살처럼 뻗어가는 강. 나는 지금 태화강에 와 있다.
태화강변에는 축제도 많고, 시설도 좋고, 사람도 많다. 태화강 백리의 시원이 가지산의 쌀바위가 되었든, 백운산의 삼각봉이 되었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죽음의 강’이라는 태화강에서 43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을 하고 철새들의 쉼터가 된 것은 경이가 아닌가.
태화강10리 대나무 숲이 어머니의 비손처럼 언제나 빌고 있어서 태화강은 어린아이의 해말건 얼굴로 저렇게 흐르나보다.
석남사 어느 비구니의 애절한 사연을 첫사랑처럼 보듬고, 부처님의 그 큰 대자대비를 가득 싣고 몸부림치며 흘러 흘러온 태화강.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의 억새밭 위에 달이 뜨면 달을 싣고, 단풍 들면 단풍을 싣고, 눈 내리면 눈을 싣고 달려 달려온 태화강.
낭만을, 사색을, 철학을, 인생을 싣고 뛰어 뛰어온 태화강. 그래서 태화강은 눈물보다 맑게, 사랑보다 아름답게 흐르나 보다.
내가 흐르면 내가 희망이요, 내가 뛰면 내가 도약이요, 내가 날면 내가 비상이라는 태화강.
구구절절 사연이 많아도 말이 많으면 좋은 시가 아니라는 걸 언제부터 태화강은 알았을까.
태화강은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세상의 감탄고토(甘呑苦吐)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삼키지도 토하지도 아니하는 불탄부토(不呑不吐)의 대자유로 무상대열반이다.
육조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의 열반진락송(涅槃眞樂頌)의 첫 구절이 더 이상 위가 없는 대열반은, 뚜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춘다는 ‘무상대열반 원명상적조(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였지.
다가갈수록 따뜻해지는 온기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사랑 찾아 흘러가는 태화강. 구고산 큰 애기가 밤 봇짐을 싸들고 사랑 찾아 임을 찾아 떠나는 신고산타령이 태화강인가.
천상병의 말마따나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 태화강 강변에 십리 대나무 숲이 엄마의 자장가로 서 있다. 순결한 처녀의 긴 머리카락처럼 치렁치렁한 70만 그루의 대나무는 한없는 순애보로 태화강을 잠시 머물게 하고, 뒤돌아보게 하며 쉬어가는 곳이라고 유혹한다.
굳이 오우가를 들먹이며 청빈을 아는 척 하고, 사군자의 향기를 들먹이며 우아함을 논하지는 않으련다. 대나무의 저 마디마디에 얽힌 사연의 빛나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태화강의 굽이쳐 돌고 도는 흥망성쇠의 찬란함도 들먹이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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