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덕수궁의 주소는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번지다.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노래, 영화, 드라마의 배경, 연인의 만남장소로도 많이 활용됐다. 근처에 직장을 둔 분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원한 그늘 아래서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기에도 적합한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 궁궐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5대 궁궐)이 있는데 이중 경복궁과 덕수궁에서는 상감의 행차식과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다.
1970년대의 우리나라 경제 사정은 그야말로 암울한 시기였으며 청춘남녀가 만날 수 있는 곳이 마땅히 없다 보니 한강변이나 흑석동 국립묘지 아니면 덕수궁에서 만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도 나는 호젓한 친구와의 만남장소로 고궁을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덕수궁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전철을 이용하기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사적 제124호로 지정돼 있으며 면적은 6만3,190㎡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경운궁으로 불렀으며 고종의 재위 말년 약 10년간 정치적 격정과 혼란의 주 무대로 한국식 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혼합된 것이 특이하다.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해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했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됐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춰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 영국, 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돼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꿨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됐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돼 원래 넓이의 3분의 1만 남게 됐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돼 일반에게 개방됐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 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과 공간적 맥락에 맞춰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대한문(大漢門)
대한문의 본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 크게 편안하다)이었는데 1906년에 지금의 이름인 대한문(大漢門, 한양이 창대해진다)으로 바뀌었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이었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70년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앉게 됐으며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해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지천에/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참 곱기도 하다// 돌담길 거닐며/ 사색의 꽃도 피워 보지만/ 획, 지나가고 싶어진다// 떨어져/ 짓뭉개진 은행 열매를/ 요리조리 피해 보지만// 구두바닥에는 그 독특한 향기가/ 춘니(春泥)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어찌 보면 그것은/ 내가 풍기는 또 다른 구린내는 아닐까/ 그런 생각조차 해보며// 가을을 가로질러/ 오늘은 깊은 사념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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