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후드기는 초가을, 토요일 오후, 논어 공부를 마치고 중국 여행을 다녀온 아랫집에서 번개팅을 청했다. 종종 식사를 같이 다니는 세부부가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모여 앉았다. 백발이 아름다운 노장 부부와 막내뻘 아내가 내 앞에 앉았다. 그러자니 나의 등 뒤에 누가 앉았는지 나는 모른다. 내 앞의 H가 내 등 뒤의 남자를 보다가 말을 내 놓는다. 
“저 남자는 혼자서 소주 두 병을 마셨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식탁을 앞질러 조리대로 가더니 막걸리 두 병을 갖고 와 우리 식탁에 놓는다.
 “보기가 참 좋습니다.”
나이든 분들이 모여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이맘 때면  뉴스마다 재래시장 이야기에 풍경이 비춰지고 제수용품 가격을 들먹이는 시기라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자극이 된다. 토요일 오후에 혼자 소주 2병을 마신 사람의 사연은 무엇일까.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막걸리 두 병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한 병만 받겠다고 하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좌석에 안정이 찾아들 때에는 이미 그 남자는 계산을 마치고 나간 후였다. 그제서야 얼른 일어나서 무어라 인사라도 하거나 합석해 이야기라도 나눌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모두가 자기의 외로웠던 시점으로 퇴행한다. 막걸리를 마시는 게 아니라 그 남자의 고독과 외로움이 희석된 잔을 기울인다. 우리는 허공에 대고 내 등 뒤의 남자가 토요일의 남은 시간이 복되기를 빌며 잔을 들어 부딪쳤다. 
“저는 추석날이면 갈 곳이 없어 중앙선 열차를 타고 무한정 갔다가 돌아오곤 했어요.”
내 남편의 가슴이 먼저 열렸다. 이어 남편이 줄줄이 사탕으로 추억이 엮이어 올라온다. 6·25때 아버지를 잃은 이야기며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소상하게 이야기하게 됐다. 나는 아내니까 몇 번 들어도 괜찮지만 밥 먹으러 왔다가 이웃에게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에만 귀를 적시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추억은 추억을 물고 릴레리 게임을 펼친다. 공원 산책을 하며 오르막길에 달하면 엄마가 보고 싶다는 백발의 남자 어른의 고백은 나의 귀를 열어줬다. 물어보지도 않고 당신이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변통하여 해결해주던 어머니가 그립다는 이야기다.
나도 내 자식의 어려움을 미리 알아서 말 하기도 전에 고통을 막아주는 바리케이드형 엄마였는데 말로 표현하고 협의한 끝에 거절도 당해 보고 응원도 받아보게 키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돼 처신을 바꾼 엄마다. 여태 길든 엄마의 보호 처신을 바꿔서 내 아들이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내가 냉정해져야 내 자식이 세상을 헤쳐갈 능력이 붙을 것 같아서 바꿨다. 훗날 변화 전의 엄마를 그리워할 지 변화 후의 엄마에게 감사하게 될 지는 아들에게 달렸다. 먼 날을 위해 내 속이 머루잎처럼 붉게 물들어도 겉으로는 냉정한 엄마로 변신했다.
평소에 말이 없는 백발 어른도 그 막걸리를 마시고는 엄마와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말 꽃을 피운다. 수박 서리를 하고 닭 잡으러 다니던 이야기가 그 시대에는 낭만이고 이 시대에는 범죄가 됐으니 말 맛이 반감되고 만다.     
한 아파트, 한 라인에서 세부부가 인연지은 지 16년차, 같은 교우로 인연지은 지는 26년차이다. 체면 차리고 눈치 볼 만큼의 시간은 흐르고 저마다의 개성과 장단점을 어느 정도 돼버렸다. 서로 마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볼 참이다. 
종종 덜 따야 점수가 나는 천사 화투를 치며 천연 웃음을 생산하기도 하고 동네 음식점을 돌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기는 해도 우리에게 토요일 오후에 홀로 소주 마시는 일은 만들지 않기로 한다. 어둠이 짙어가는 거리로 나와서 느릿하게 걷는데, 내 등 뒤의 남자가 남기고 간 빈 병 두 개가 아른거린다.  아직은 초승달, 저 달이 찰 때까지 그 남자는 소주를 마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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