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헬조선. 요즘 가장 뜨는 핫한 단어다.
영어와 한자로 조합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은 외국인이 들으면 도통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한반도 사정에 능통하고 센스가 좀 있는 외국인이라면 ‘조선’을 국호로 채택한 곳이 북쪽이니 헬조선이 ‘북한의 지옥 같은 상황’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천만의 말씀. 헬조선은 남쪽의 젊은이들이 ‘지옥 같은 대한민국의 실상’을 신랄하게 드러낸 신조어다. 졸업해도 취업할 곳이 없고, 하루 10시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해도 학비로 빌린 대출금조차 갚을 수 없다 보니,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흙수저’들의 입에서 ‘개한민국’을 떠나고 싶다며 절규하듯 터져 나온 말이 바로 ‘헬조선’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 속담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통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도 고생하는’ 시대다. 청년기에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죽을 때까지도 열심히 삽질해야만 밥 먹을 수 있는 개미일 뿐이고, 젊어서 유유자적하는 베짱이는 죽을 때도 ‘금수저’ 물고 관에 들어가는 베짱이인 사회다.
정부는 오래전부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모든 게 다 풀릴 것이라 장담했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됐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노동하기 나쁜 나라’가 됐다.
국가의 특혜를 입은 재벌들은 기술개발과 경쟁력 강화는 뒷전이고 빵장사, 커피장사, 밥장사까지 벌여 가뜩이나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돌격대인 국제통화기금(IMF)이 ‘부자가 잘되면 가난한 사람에게도 파이가 돌아간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는 “완전히 틀린 논리”라고 선언했으니 한국의 경제정책도 파산선고를 받은 셈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니 청년문제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한쪽에선 청년실업 문제를 세대 간 갈등으로 치환시키려 하고, 다른 쪽에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젊은이를 외면한 채 한 줌 남은 기득권마저 빼앗길까 아우성이다. ‘헬조선’의 살풍경이다.
한국엔 ‘헬아파트’도 있다. 외국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토교통위원회 김태원 의원에게 제출한 주택관리공단 자료에 의하면 2012년부터 올 8월까지 전국 임대아파트에서 발생한 입주민의 관리직원에 대한 폭언 폭행 사건이 850건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1면)
이 숫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제 현장에선 웬만한 모욕과 폭행은 그냥 넘어가는 게 다반사다. 실업의 고통에 비하면 이쯤은 별 거 아니라고 자위하며 참아야만 한다. 더구나 전국 아파트의 극소수만 담당하고 있는 주택관리공단의 자료란 걸 감안하면 수면 아래의 진실은 훨씬 더 거대한 숫자로 떠오를 것이다.
흉기협박과 주취폭행, 기물파손에 자해까지 이어져 연로한 경비원들은 물론이고 비교적 젊은 직원까지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지난 연말 분신자살을 하고, 얼마 전엔 주차문제로 폭행당해 사망한 경비원도 있었다. 외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들이다.
통계에 의하면 함께 잘 사는 나라도, 모두 못 사는 나라도 극단적 범죄가 흔치 않은데 반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나라에서만 유독 살인사건을 비롯한 강력범죄가 심하다고 한다.
결국 ‘헬조선’이 ‘헬아파트’를 잉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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