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농부의 믿음이 없었다면 들판이 저토록 풍요로울 수가 있었을까, 과수원에 과일을 저토록 주렁주렁 달리게 하였을까.
‘신위도원 공덕모(信爲道元 功德母)'라고 화엄경 현수품에 나오는 이 게송은 화엄사 보제루와 동국대학교 정각원 주련에도 걸려 있는 말이다. 믿음은 도의 으뜸이며 공덕의 어머니라고.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에서도 믿음은 악마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높은 도에 이른다고 했으며, 아함경에도 믿는 마음은 모든 씨앗이라고 ‘신심위종자(信心爲種子)’라 했다.
장사꾼의 밑천이, 정치가의 밑천이, 뒷골목의 밑천이, 부부의 밑천이 믿음이다.
우리 같이 천보간난(天步艱難) 놈이 믿음마저 없었다면, 지난 여름을 무엇으로 버티고 무엇으로 견디어 이 가을을 맞이했을까.
푸른하늘에 손을 담가 허공을 휘어잡는 소나무도 첩첩(疊疊)으로, 중중(重重)으로 부는 바람을 겁내지 않는 가을, 귀뚜라미가 어머니의 비손처럼 울고 있다.
가을에는 모든 사물이, 너와 내가 가만히 제 자리에 서 있어도 참으로 아름답다.
이 가을에는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란 시를 구태여 들먹이지 않아도 좋은데 들먹여 본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은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은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9월이다. 시인의 ‘가을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었으면 좋겠다. 대추나무가 휘어지도록, 단감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익어가는 가을이다. 지난 여름에 멈춰버린 그 길을 다시 거기서부터 걷고 싶다.
순정의 코스모스와 기쁜 소식의 나팔꽃이 피어 있는 그 길에, 하늘이 뜻밖의 천복(天福)을 내릴지 그 누가 알리요.
함안 강주리의 해바라기축제장에는 유독 올해의 해바라기가 예쁘고 예뻐 길을 묻는 사람이 많고, 털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집 하나 들고, 격랑을 지나온 풍요로운 이 가을에 황홀한 추임새 한 곡조 뽑고 싶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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