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영지
불국사역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2㎞쯤 지나면 오른쪽으로 영지라는 못이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을 안은 못가에서는 물론 석가탑의 그림자를 볼 길은 없으나 동쪽으로 토함산 불국사 앞 주차장이 멀리 보여 전설이긴 하지만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띄는 유적은 없으나 석가탑에 얽힌 전설의 현장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어 강태공들의 낚시터로 인기가 높다.
저수지 남쪽에 얼굴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마멸이 심한 석불좌상이 하나 있다. 아사달이 조각했다는 석불이다. 마멸이 심한 것도 있지만 원래 미완성의 불상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연화좌대나 석불의 몸체로 미뤄 보면 마멸로 인한 것이든 미완성의 작품이든 단정한 얼굴 모습이 조각됐을 터이다.

◈영지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해 두해가 흘렀다. 남편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싶어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그림자가 비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림자는 떠오를 줄 몰랐다.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영지’라고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했다.

◈신라 신문왕릉
사천왕사 터를 지나 문무로를 지나면 왼쪽으로 31대 신문왕의 능이 있다. 신문왕(681~692)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재위 12년 동안 관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했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외국과도 빈번히 교류해 문화의 융성을 도모하는 등 신라 전성시대의 기틀을 확립했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서 밑지름은 29.3m이고 높이는 7.6m다. 밑 둘레는 메주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으며 이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44개의 호석을 설치했다. 이와 같은 구조의 호석은 통일신라 왕릉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이 나타나기 전 단계의 것으로 고신라 고분 보다는 한층 발달한 형식이다.

천년의 고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를 다 답사하려면 몇 개월은 걸릴 것이다. 이번 첫 답사에서 나름대로의 답사일정과 코스를 정해보기도 했으나 방대한 지역과 유물 유적이 산재해 있는 경주는 가는 곳 닫는 곳마다 문화유산이라 차라리 발걸음 닫는대로 1차 답사를 하기로 정했다. 그러다 보니 주마간산격으로 답사하게 되고 그다지 체계적이지도 못해 다소는 산만한 느낌도 들며 아쉬움 또한 많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으므로 추가 답사기를 약속하고 이번 답사기를 여기서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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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경주 길라잡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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