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9월이다.
지난 여름에 지친 영혼을 일깨우고, 각 사물의 이름을 호명하며 생애 최초의 환희인양 존재를 야무지게 드러내는 계절이다. 고창의 선운사, 영광의 불갑사, 함평의 용천사에 꽃무릇이 상사화로 붉게 피어나고, 평창 봉평에는 이효석의 메밀꽃이 하얀 나비로 휘날린다.
거친 세월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아온 가을의 들머리에서,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신랑 신부의 맞절처럼 고개를 더욱 숙이고, 토실토실한 알밤이 처녀의 젖가슴처럼 부풀고 부풀어 벌어지는 시간이다. 아침이슬에 피어나는 노란 호박꽃이 기어이 누렁이호박을 만들고, 저녁 답에 피어나는 하얀 박꽃이 기어이 웃음보다 더 큰 하얀 함박을 만들었다.
민석이 아빠는 조상님 산소로 벌초를 떠나고, 재웅이 아빠는 김장배추의 모종을 한다.
순이네는 추석이라고 고향 갈 차표를 예약하고, 올 가을에 아들 녀석 늦은 장가 보내는 김씨 아지매가 몹시도 종종걸음이다.
우리 집 앞 마산의 제1부두 가고파 국화축제가 열리는 곳의 특설무대에서는 제12회 학산 김성률배전국장사씨름대회의 기합소리가 호미걸이로, 들배지기로, 차돌리기로 울려 퍼지고, 창원 KBS홀에서는 장윤정의 노래가, 진해문화센터 대공연장에서는 인간문화제 박수관 명창의 동부민요가 삶과 죽음을 관통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세계 5대 연안습지인 순천만에, 축구장 150배 면적으로 국내 최대의 인공정원인 순천만정원이 대한민국 국가정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는 오늘, 마흔 살의 나이로 400홈런에 이어 2루타까지 400개를 돌파한 최초의 한국 선수가 탄생했으니 이승엽이다.
영도다리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부산 영도대교 야간도개행사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아래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린 오늘, 김달진 문학심포지엄에도 귀를 쫑긋거리고, 김달진 문학상 시부분에 ‘그림자에 불타다’란 시집으로 수상한 정현종 시인을 향해 박수도 많이 치니, 무슨 일로 이리도 바쁠까. 거론된 이 모두가 2015년 9월 5일 토요일에 벌어진 일이다.
이만치 앉았거나, 저만치 떨어졌거나, 엉거주춤 서 있거나, 소소한 일상들이 모이고 범속한 예사가 모이면 공감이 되고 감동이 되는 가을인가보다. 
가을 햇살 하나라도 예사롭지가 않다. 구름이 덮였다가, 비가 내렸다가, 해가 났다가 하는 날씨에도 빨간 고추를 말리는 손들이 접었다 펼쳤다 몹시도 바쁘지만 이 얼마나 소중한 주말인가.
사는 기쁨의 절반이 추억이라 하고, 어차피 인간은 과거가 많아지는 유한(有限)이니, 어둔 밤하늘의 별도 오늘 자주 쳐다보아야겠다.
9월이다. 출렁이고 출렁이는 가을 들판에 오탁번의 암놈 등에 올라탄 수메뚜기가 뜀박질을 하고, 암놈 머리채를 잡은 수잠자리가 창공으로 창공으로 비행을 한다.
뛰면서도 날면서도 사랑을 나누는 계절, 자연에게나 인간에게나 믿음이 우선인가보다.
믿음이 최고의 사랑인가보다. 믿음이 최고의 행복인가보다. 위험하면서도 믿는 마음이 있어, 메뚜기가 잠자리가 함께 뛰고 날지 않는가.
일요일에 잠깐 서는 새벽번개시장의 리어카신발장수가 백화점에 가면 이십오만 원이 넘는다는 신발을 일만 원에 판다면서, 속고만 살았나, 일단 한번 신어보라고 입에 침이 마르지만 신어보는 사람이 좀체 보이질 않는다.
연애는 해봐야 맛을 알고 신발은 신어봐야 편한지를 안다고 그 지당한 말씀을 떠들고 외치건만 믿음이 아무래도 수상쩍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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