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올해 들어 나는 상당수의 것들을 보수하거나 개비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공부를 하던 내 아들이 마지막 수험생이 되기로 작정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데, 집의 가전제품이나 내 주변의 것들이 낡거나 부서지거나 망가져서 수선해야 할 것들이 줄을 선다. 갈망하고 걱정하는 기운이 전자제품의 생명을 단축한 것일까 싶을 정도로 여유 없이 명을 달리 한다.
합격자 발표 이틀 전에 18년 된 세탁기가 멈췄다. 아프지도 않고 살다가 급사를 했다. 그래도 빨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쌓아뒀다. 아랫집에서는 자기집에 와서 세탁을 하라고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되는대로 입고 며칠간 버틸 참이다.
 고맙게도 아들이 합격해줘 아들도 인생 보수를 한 셈이다. 그 날로 나는 세탁기를 주문했다. 자세히 알아보고 모델을 보고 그럴 만큼의 여유가 없어 전자 제품을 최근에 구입한 동생편에 문의해 간단하게 처리했다.
겨우 한숨 돌리고 나니 20년 동안 아프지도 않고 잘 살아오던 냉장고가 예고도 없이 심장마비가 왔다. 배터리가 나가서 45만원의 수선비가 든다는 것이다. 전제품의 줄 초상이다. 장례를 치르고 얼른 우리집 부엌과 재혼살림을 차려야 하는데 중매쟁이를 사이에 낄 여유가 없다.
마침 서비스하러 나온 팀장이 제품 소개를 한다. 미국의 2등 제품을 한정 판매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카달로그를 보고 즉석에서 구매했다. 아직 소비자의 검증을 거친 제품이 아닌 것 같으나 가격이 절반 정도 밖에 안되니 수명을 절반 정도로만 기대하면 족할 것 같아 구매했다. 다양한 기능이 있는 것을 피하고 냉동고와 냉장고 역할만 잘 해주면 만족이라고 바랐더니 있다. 선택했다. 구매 절차를 마치고 나니 인생에 날개를 단 듯 한가롭다.
마음을 정돈하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노트북이 고장 나고 냄비 뚜껑의 손잡이가 똑 떨어진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노트북 이용도가 높은 줄 미처 몰랐다. 작동이 멈추자 거의 패닉 상태가 된다. 바로 노트북이 나의 머리이고 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등치가 작고 수선이 간단하니 그 또한 얼른 수습됐다. 이러한 일상 회복의 속도를 당기는 것이 나를 도시 복판에 살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합격자 발표, 고장 난 가전제품 수리 및 구입을 거치는 동안 답답했던 일상이 죄다 풀렸다고 생각하는 날, 남편과 외출을 하려고 옷을 입는데 한복 두루마기형 코트의 단추가 뚝 떨어진다. 벗는다. 다시 코트를 입으려니 또 단추가 떨어진다. 벗는다. 이번에는 두꺼운 속옷을 입고 실크 치마를 입으려니 단이 닳아서 가로지기로 찢어진다. 도대체 입고 나설려고만 하면 참았던 결함이 들추고 일어나니 무슨 통속인 줄 모르겠다.
내 주변의 것들이 그동안 나를 돕자고 결의를 한 것일까. 참았다가 한꺼번에 나가는게 좋겠다고 회의라도 한 것처럼 하나씩 줄지어 망가지고 깨지고 닳아지면서 나와 이별을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으니 돋보기는 다리가 부러지고 가방은 줄이 끊어진다. 탁상용 스탠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핸드폰은 용량이 다 차서 그림이 저장되지 않는다. 사용자가 이상한 것인지 물건이 수명을 다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2015년은 그렇게 하자 보수와 개비로 채워졌다. 다시 새 것이 닳아지게 살고 내 안에 보람이란 가루를 모아 무엇인가를 빚어내야 할 것이란 생각만 가득하다.
어느새 9월이다. 이제 내 아들도 수습기간이 3개월 남았다. 그 사이 부모를 닮아 자기 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수험서를 한 권 내어 저자가 됐다. 누군가의 삶이 또 닳아질 것이다.
나도 그동안 미루어 오던 책을 묶을 생각으로 원고를 뺀다. 148쪽까지 정리를 하다가 한 줄 남고 원고가 다 날아갔다. 머리에 불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공원으로 갔다. 너도밤나무 열매가 툭툭 떨어지고 도토리도 후두둑 떨어진다. 저들도 모체와 이별을 한다. 아들의 합격 소식이 우리집에 들어오기 위해 나는 그렇게 수많은 것들과 이별을 했다. 참아준 모든 것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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