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신선하지 않으면 지루한 토요일, 나는 그날의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늘 들썩거려진다. 그래서 토요일의 차 한잔은 특별해야 한다. 그 특별함이란 퇴색한 거리에서 유행 지난 마네킹을 만나도 좋고, 화가가 금방 붓을 놓은 듯한 그림들과 만나도 좋고,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 조금 멀리 나아가 소쇄원이나 외도의 잘 가꿔진 풍경과 만나면 더욱 좋다. 
이곳저곳을 떠올리다가 결국 인사동을 택했다. 딸과 인사동으로 나가 사람들의 어깨를 피해 가며 거리를 거닐었다. 눈을 히번득거려도 특별히 자극하는 요소가 없다. 어느새 시간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흘렀고 다리는 뻐근하다. 우리는 혹사한 발을 풀기 위해 찻집을 찾았다. 흔한 찻집도 막상 찾으려니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독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커브를 틀어 아름다운 가게를 지나자 해질녘의 스산함이 엄습한다. 나는 딸의 팔을 바짝 잡아당겨 다분다분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푸른 숲’이란 간판을 보고 멈추었다. 찻집 가까이에서 유리문 안의 느티나무를 보는 순간, 그 나무에 이끌리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를 주문하고 나서도 내내 그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람과 한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고 사는 나무가 마치 그 집 식구 같았다. 그 찻집은 주택의 일부를 헐어 개조한 공간으로 도로변의 벽을 통유리로 바꿨다. 출입문을 통과하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짧은 골목이 이어지다가 좌로 몸을 틀면 테이블 두 개에 8석의 의자가 손님을 기다린다. 주인이 나무와 벗하기에는 너무나 무료해 찻집을 낸 듯 마냥 편안했다.
창 밖의 풍경이 정겹다. 마치 유리문 너머로 영화가 상영되는 것 같고 나는 찻집에 앉은 그 시대의 주인공 같다. 차가 나오는 동안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낡아가는 도심의 뒷골목은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의 색깔을 닮았다. 
길 건너 양장점의 쇼윈도우에는 여기저기 상처 난 구식 마네킹이 유행과 무관한 옷을 입고 서 있다. 가요 반세기의 레코드 재킷에 등장하는 인물 같다. 그 옆의 수선집에 드나드는 객들 또한 영화 속 엑스트라를 닮았다. 어디선가 박물장수의 외침이라도 들릴 듯이 구태를 벗지 않은 풍경은 친구집 장롱 위에서 본 박제새 같다.   
그러나 찻집 안의 나무는 어제도 오늘도 새 잎을 내고 가지를 쳤으니 제대로 세월을 산다. 우리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받아 충전하고 그 찻집에서 마음을 정돈한 다음, 다시 거리로 나올 참이다. 계산대에서 나무에 대해 물었다. 처음에는 시멘트 바닥에 흙을 얹고 나무를 심었더니 비실비실 자라지 못해 시멘트를 걷어내고서야 생명력을 얻더라고 했다.
그 말은 내 머리에 번개를 치고 들어온다. 나무는 땅속 깊은 곳에서 기운을 받아야 자랄 수 있고 사람은 역사로부터 정신을 수혈받아야 융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번쩍거리는 빌딩 숲에서는 사람도 비실거리고 시멘트 바닥 위에서는 나무도 자라기 어렵다. 사람의 정신은 역사에 뿌리가 닿아있어야 왕성하게 자랄 수 있고 나무는 깊은 곳에서부터 지기를 받아야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데, 우리 아파트의 정원수인 주목은 기운을 빨아올릴 지층이 얕아서 올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다 했다. 겨우겨우 연명만 하다가 가뭄이 심해지고 여름이 더 더워지니 견디기가 어려웠는가 보다.
주목 나무는 죽인 것인가, 죽은 것인가.
지식을 동원해 살렸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한 게 아니라 사람이든 나무든 생명의 신비를 다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말없는 나무가 되기로 했다.
내가 사는 동 앞의 나무에게 애정 어린 눈길 한번 줬는가 물어보니 할 말이 없다. 거기서 늘 잘 살고 있으려니 하고 믿어버린 것이 사랑은 아니니까.
나무를 그렇게 보다가 모진 모습으로 보게 되듯, 사람도 그렇게 타성에 젖어 보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타성의 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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