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매월당 영당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 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 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은거했던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됐다. 고종 15년(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해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후 퇴락해 1998년 경주시내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했으며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생은 세종 17년(1435)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총망됐으나 단종 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 10년(1465)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그후 성종 2년(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했으나 성종 24(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이다.

발끝에 맡겨/ 김시습

발끝에 맡겨/ 종일을 가도,/ 청산 끝나면/ 또 청산일다.// 잡념 없으니/ 홀가분한 몸,/ 바른 길 두고/ 왼 길을 가랴?// 날 새자 산새/ 재잘거리고,/ 봄바람 솔솔/ 들꽃이 밝다.// 천봉 고요로/ 돌아가는 길,/ 푸른 벼랑의 맑은 저녁놀...
※이는 작자의 사상과 행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경주 골굴암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의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다.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굴은 법당굴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 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돼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돼 있다. 최근에 골굴암 마애불로 오르내리는 길은 안전하게 단장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서진다고 한다. 지금은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하우스 같은 둥근 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을 설치했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 석굴이 있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만큼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봐 골굴암은 원효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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