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 석굴암을 다시 복원했을 때 나왔던 석조물들

◈경덕왕의 아들 얻는 이야기
하늘이 인간에게 복을 내릴 때 전부 다를 주는 법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는 말도 있는데 통일신라의 문화적 전성기를 장식했던 경덕왕은 복이 많은 분이었지만 자식 복은 없어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경덕왕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능력 있는 스님인 표훈대사에게 부탁하게 된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해 아들을 두게 해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문란케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하늘과 사람 사이를) 이웃마을처럼 왕래해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 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아야 한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는 8세 때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 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아낼 수 없었다. 표훈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주머니를 차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이 된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석불사 석굴암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와 과학의 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이며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다. 석굴암에 있는 토함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하늘 끝과 맞닿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봉우리들이 하늘과 만나는 절경을 볼 수 있다.
필자가 경주문화유산 답사를 하는 내내 어른들은 별로 없고 초등학생들만 와글와글했다. 옛날에는 신혼여행 또는 초겵?고등학교의 수학여행지로 가장 선호도가 높은 고도이었지만 지금은 신혼여행은 외국으로, 중겙玆紵剋壎湧?공부할 것이 많아서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공부 중에 역사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뿌리를 알고 조상님이 남긴 유산을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인데도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경주시청에서도 안내서나 표지판만으로도 충분한 답사가 이뤄지게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몇 번씩 헛걸음을 하다 겨우 찾아간 적도 있으니 외국 사람은 그 고통이 어떠하랴. 조금만 더 세심한 신경을 쓰면 우리나라의 이미지나 문화재 관리가 철저히 이뤄지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부분은 하루빨리 시정돼야 할 것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에 의해 창건됐는데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경덕왕 10년(751)에 착공했으며 김대성이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눠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돼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물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춰 하나의 불국토를 이뤘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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