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금동비로자나불상

▲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높이 1.8m 머리 높이는 55㎝ 폭은 1.36m 몸은 바로 앉아서 정면을 향한 모습이고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세워 왼손으로 잡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불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한 것이다. 지권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살찐 듯한 얼굴에서 중후함이 느껴진다.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다부지게 꼭 다문 입술, 지긋하게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비로운 눈, 단정히 결가부좌하고 손을 지권인으로 해 가슴 앞에 들고 있는 힘찬 모습은 민첩한 활동력을 나타내는 부드럽고 힘차게 흐르는 옷자락과 더불어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씩씩한 기상을 보여준다. 국보 제26호다.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
김교각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제33대 성덕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24세에 출가해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갔다. 스님은 처음에는 중국 각지를 유행하다가 구화산에 이르러 수려한 풍광에 매료돼 초당을 짓고 초인적인 수행을 했다.
구화산의 주인이며 이 지역의 토호인 민양화의 아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 스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민양화가 스님을 찾아 답례하고자 필요한 것을 물으니 스님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절을 짓고자하니 가사크기 만큼의 땅을 시주해 달라 했다. 이에 민양화가 승낙해 스님이 가사를 펼치니 구화산 99개 봉우리를 모두 덮어버렸다. 놀란 민양화가 스님에게 귀의해 구화산을 시주했다는 일화는 김교각 스님의 법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스님은 구화산에서 최초로 화성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중생 구제에 전력했으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당시 모든 사람에게 추앙됐다. 사서에 의하면 김교각 스님을 친견하려는 대중이 하루에 천 명을 넘었으며 그 행렬이 산 밑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스님은 서기 794년 수행자의 자세로 입적하시니 세납 99세였다. 시신은 3년이 지나도 얼굴과 살갗은 살아 있는 듯 향내음이 가득했다. 그리해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으니 육신보전(肉身寶殿)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구화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이 됐으며 김교각 스님은 자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생전에 언제 고국인 서라벌로 돌아가시느냐고 여쭈니 스님은 “1300년 후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1997년 스님의 탄신 1,300 주년을 기념해 김교각 스님의 탄생지인 경주에 구화산 화성사로부터 기증받은 등상(等像)을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게 돼 김교각 스님의 유언대로 다시 고국에 돌아왔으며 지장보살의 자비를 펼치려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불국사는 김교각 스님의 등상을 봉안함으로써 자장보살의 화신과 원력이 깃든 진정한 지장신앙의 도량이라 할 수 있다.

구화산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

달빛마저 서러운/ 서라벌 밤길을/ 상념 속에 걷고 있는/ 장래를 촉망 받던 신라왕자는/ 구도의 길 찾아가는 걸승이 되었네// 세월은 돌고 돌아/ 20년을 훌쩍 넘어/ 비단옷 버리고 납의를 걸치고/ 바다 건너 강남 땅 구화산에서/ 지장보살로 화현하셨네// 맑은 눈빛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민초를 위함이 참 보살행이라”/ 몸소 실천하는 그 모습에/ 시선 이백도 그대 위해 찬讚을 짓고/ 만상 황제도 그대 위한 친필 편액을 내리셨네// 지장의 불법은 아직도 살아/ 구화산 연봉을 활활 타 오르는데,/ 잔잔한 미소와 별처럼 쏟아지던/ 법문은 들을 수 없고// 육신을 벗어버리고/ 육신불로 살아남아/“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교각스님 말씀만 귓전을 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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