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지난 2013년 봄, 화사한 봄꽃이 꽃망울을 틔우던 4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투표함이 사라졌다. 밤늦게까지 동대표 선출을 위한 방문투표를 하던 중 후보 A씨가 경비원이 들고 있던 투표함을 빼앗아 달아난 것이다. 선관위원 B씨와 경비원 C씨가 A씨를 뒤쫓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늦은 밤, 이들은 고함을 지르며 단지를 빙빙 도는 추격전을 시작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결국 이 촌극은 A씨가 붙잡히면서 마무리됐다.


사례 2
수도권의 한 아파트는 대규모 아파트 보수공사를 앞두고 동대표 선거를 진행했다. 입주민이 두 무리로 갈려 선거구마다 양측 후보가 맞서며 선거는 과열 양상을 보였다. 근소한 차로 한 쪽이 승리하자 패배한 쪽의 입주민들은 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며 관할 지자체에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했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지금까지 공동주택에서의 선거는 이런 양상을 띠기도 했다.
The winner takes it all. 승자독식. 동대표가 되면 아파트의 주요 결정권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의 규모와 관계없이 선거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이권을 노리고 당선된 동대표들이 입주민을 위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공동주택 실태조사에서 가장 많이 적발되는 공사·용역업체 선정을 둘러싼 비리는 입주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동대표 선거로부터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비리의 고리를 끊고자 지난 2월 서울시는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했다. 개정된 준칙에는 입주자대표회의 구성, 공동주택 관리방법의 결정과 변경, 관리규약의 제정과 개정 등에 온라인 투표를 독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울시는 올해 상반기까지 관내 30개 단지에서 온라인 투표를 실시해 결과분석에 들어간다. 투표대상은 동대표 선거, 회장·감사 선거, 관리규약 개정, 장기수선계획 조정 등이다. 시는 입주민 만족도 평가 등 다양한 분석을 토대로 공동주택에 온라인 투표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나아가 추후 공사·용역업체 선정에도 입주민 전체의 의견을 묻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공동주택의 동대표 선거는 단독 후보의 경우 선거구 전체 입주민 50% 이상의 투표율을 기록해야만 한다. 하지만 투표율 50%는 지난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 투표율인 36%와 비교해도 너무 높은 기준이다. 기준을 따르다보니 많은 공동주택은 심야까지 방문투표를 진행해야 했다.
온라인 투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던 높은 투표율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중앙선관위원회 K-voting 온라인 투표를 통해 지난 2013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전국 200여 공동주택의 평균 투표율은 51.4%를 기록했다. 현행 수기투표의 투표율이 10~20% 내외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다.
온라인 투표는 2인 이상 후보가 출마했을 때 불거지는 선거 부정에 대한 의심과 투표 시비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중앙선관위 시스템을 통해 모바일, 인터넷 등으로 진행하는 온라인 투표는 부정이나 무효표 시비로 인한 다툼을 원천 차단한다.
상당수의 공동주택에서 투표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투표율 40% 이상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온라인 투표는 유효투표율과 선거 절차의 투명성 등으로 고민하던 아파트에게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중앙선관위 온라인 투표의 비용은 공동주택의 경우 2,000가구 이하는 가구당 700원으로 책정돼 있다. 2,001~4,000가구는 가구당 600원, 4,001~6,000가구는 가구당 500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K-voting 직원이 현장에 지원을 나가면 1명당 20만원의 수수료가 더 발생한다. 서울에서 200㎞를 초과하는 지역은 30만원이다. 대전에 있는 1,000가구 아파트가 현장 지원 2명을 받으면 총 비용은 (1,000×770원+2×22만원, 부가세 포함) 121만원이 든다.
수기 투표를 진행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다. 그럼에도 서울 대림현대3차아파트(1,162가구)는 올해 벌써 2차례나 온라인 투표(동대표 선거, 회장·감사 선거)를 진행했다.
이 아파트 정현종 관리소장은 “비용은 온라인 투표가 더 많이 든다. 수기투표 비용은 투표용지 인쇄비 정도면 되지만 온라인투표는 이번 회장·감사 선거를 통해 약 100만원 가량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온라인 투표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선거를 둘러싼 다툼이 얼마나 잦았나”라며 반문했다.
정 관리소장은 “온라인 투표를 실시하고부터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사라졌다. 입주민은 선거 결과를 신뢰하고 선관위원들은 선거가 일찍 끝난다며 무척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이 아파트 입주민도 “온라인 투표는 1분이면 충분하고 무엇보다 중앙선관위를 통해서 하다 보니 결과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답했다.
온라인, 모바일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소함에 온라인 투표를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 K-voting 박재영 업무지원센터장은 “주택관리 전문가인 관리소장이라면 1시간 교육으로 모든 과정을 마스터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설령 컴퓨터를 전혀 못 다뤄도 K-voting 직원이 직접 단지로 지원을 간다. 또 K-voting콜센터에서 모든 상황에 대한 면밀한 안내와 도움을 준다”고 자신했다.
그래도 어렵다면 관리과장이나 시설관리자에게 맡겨도 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아파트에서 관리과장이 온라인 투표에 대한 실무를 진행하고 있다. 
K-voting에서 터치 스크린 모니터(2대), 노트북(15인치), 노트북(11인치), 투표코드용 프린터, 인터넷 공유기를 제공해 아파트에서 비용을 들여 전자기기를 구매하는 일은 없다. 투표 시스템은 선관위 직원이 설치하고 사용법을 알려준다. 관리사무소는 선거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선관위에서 준비하고 돕는다면 단지에서 해야 할 일은 뭘까.
서울시 공동주택과는 “단지에서는 입주민 연락처 업데이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실제로 입주 초기 입주자카드에 기재한 휴대전화 연락처와 현재 연락처가 달라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연락처 변경으로 투표인증 문자를 받지 못했음에도 많은 입주민들이 현장투표소로 나와 모니터를 터치하며 대부분의 단지에서 50%를 넘는 투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입주민 연락처 업데이트가 이뤄지면 투표율은 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난방비 사건과 실태조사 등에서 드러난 일부 아파트의 지적 사례로 인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온 관리종사자 상당수가 의심과 억측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은 권한이 소수의 아파트 대표자들에게 주어지고 다수의 일반 입주민들은 정보를 얻거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적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택법이 현재와 같이 대표자를 구성해 의결 권한을 부여했던 것은 제정 당시 모든 입주민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사를 취합할 시간과 장소에 대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입주민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권리를 행사할 여건이 준비됐다. 
온라인 투표는 지금껏 소수의 대표자에게 집중됐던 권한을 입주민 모두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수행할 단초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공동주택 제도 발전을 위해 현장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고 있는 관리소장과 입주민을 대표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있는 입대의 구성원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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