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
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는 선덕여왕이며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의 연호) 6년 임진년(632)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여왕은 미리 안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그림과 그 씨를 보내왔는데 그 그림을 보고 왕이 말했다.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시를 뜰에 심었더니 마침내 꽃이 피었다. 그러나 꽃이 떨어질 때까지도 과연 선덕여왕의 말대로 꽃에 향기가 없었다.
두 번째는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 4일 동안 울어댔다. 사람들이 개구리 울음을 괴이해 왕에게 물었다. 왕은 각간 알천과 필탄등을 불러 말했다. “병사 2,000명을 거느리고 빨리 서교(西郊)로 가 여근곡(女根谷)쪹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라”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여근곡을 묻자 과연 부산 아래에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 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 백제의 장군 우소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마찬가지로 포위해 죽였다. 그리고 원군 1,300명이 오는 것을 또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세 번째는 왕에게 병이 없었는데도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시오”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물었다. “그곳이 어느 곳입니까?” “낭산 남쪽이오”
얼마 뒤 여왕은 예언한 그날 세상을 떠났고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여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서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됐다.
여왕이 살아 있을 때 신하들이 아뢰었다. “모란꽃 그림과 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꽃 그림에는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이는 당나라 임금이 짐이 배우자가 없음을 놀린 것이오. 또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며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니 여자는 음이고 그 음은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방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그들을 쉽사리 잡을 줄 알았소”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뛰어난 지혜에 감복했다. 세 가지 색깔의 꽃을 보냄은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있을 줄 알고 그렇게 한 것인가. 선덕, 진덕, 진성 등이 바로 세 명의 여왕이니 당 태종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로 지정돼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 92-2에 소재한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 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은 쌓아 올린 형태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이 석축돼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여근곡: 건천읍 부산 아래 산줄기로 지형이 영락없이 여자의 국부처럼 생겨 이런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보러가는 선비가 이 길로 지나가면 꼭 떨어졌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경주터널을 지나 산자락 한 굽이를 돌아서면 바로 나타난다. 그 중앙에는 옥문지라는 샘이 있어 더욱 신비롭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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