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분황사 석정(石井)
경상북도 문화재 재료 제9호로 등록돼 있는 이 석정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 안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신라의 호국룡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 본국으로 떠났다. 그 뒤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자신들은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신시켜 대나무 통 속에 넣어 갔다면서 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찾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줘 살게 했다는 전설이 기록돼 있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원효대사(617~686)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 화쟁, 초명은 서당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 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중 토굴 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 맛이 매우 달고 시원했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닌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그후 파계했다. 파계한 후 속복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하면서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됐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본래 본성인 일심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나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했고 ‘십문화쟁론’을 찬술했다. 분황사에서 ‘화엄경’, ‘사십회향품소’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해 분황사에 봉안했다.

◈황룡사지
사적 제6호로 등록돼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이 절은 신라 진흥왕 14년(553)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해 절 이름을 황룡사라고 했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해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 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황룡사 대지는 80,928㎡에 달하는 늪지를 매립해 마련됐음을 알게 됐다. 사찰의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 절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금당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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