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 감실적불좌상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탑골 입구에서 서북쪽으로 약 350m 돌아 들어간 곳이 부처골이다. 감실부처를 찾아가는 길은 평지에 가까운 낮은 언덕길로 약 300m 정도 올라간다. 그러나 감실부처를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필자도 몇 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석불좌상은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는 1.7m, 폭 1.2m, 깊이 60㎝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고부조로 새긴 것으로 높이는 1.4m 정도다. 감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돼 있고 석굴의 느낌을 준다. 석불 안의 불상은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이 깨어진 것 말고는 완전한 불상으로 남아 있다. 약간 숙인 얼굴에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다소곳한 자태, 둥근 얼굴에 수줍은 듯한 미소가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머리에는 작은 육계가 솟아 있는데 마치 아주머니가 머리를 틀어 올린 듯하다. 두 손은 소매 속에 들어 있으며 법의는 넓게 주름을 주면서 편하게 앉은 두 무릎을 덮고 아래까지 흐르고 있다. 상체에 비해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은 유난히 크게 과장했다. 이러한 비사실적인 수법이 이 불상의 다소곳한 모습과 함께 고졸한 인상을 더해준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양식으로 봐 고신라에 속하며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이 석굴 불상도 예전에는 어느 절에 속해 있었을 것이나 이제는 조용히 불상만 홀로 남아 부처골 감실부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보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서 만난 어느 절실한 아주머니는 항상 마음이 울적하면 와서 부처님과 얘기하다보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나도 이 부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편안해진다.

◈분황사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 일대에 있는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634)에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 당대 명승 자장율사(590~658)와 원효대사(617~686)가 주석했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이 구리 30만6,700근으로 주성했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 전각이 소실돼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기단 규모나 형태로 봐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했다. 1층 몸체 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을 지키는 인왕상이 돋을새김 돼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石)사자를 배치했다.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는 여러 가지 구슬, 금 가위, 은 바늘과 은 함, 숭령통보 상평오수 등이 들어 있어 고려 숙종, 예종 연간에 해체·수리됐던 것을 알 수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돼 있는 이 비부는 고려시대 세워진 원효대사비의 받침 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됐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했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해 이를 확인했다.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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