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청양의 을미년에는 햇살 같은 악수와 향기로운 박수가 많았으면 좋겠다. 어느 시대이고 시련이 없겠냐만 시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악수하고 박수치면 저절로 우리 몸에는 물기도 많아 항암이 된다.지금 4,400개의 요양원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악수도 못하고, 본정신이 없어 박수를 못 치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예식장에서 금방 ‘윤서방’이라고 했는데 돌아서면 누구냐고 묻고 또 누구냐고 묻는 당신은 나의 슬픈 처이모님이어라. 자기 손자 녀석이 결혼을 하는데도 누구 결혼이냐고 묻고 또 묻는 서러움이여.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모르는 신경림의 ‘갈대’가 생각난다.
라자루스 신드롬이 있다지만 시신을 수습해 가지 않는 고독사가 연간 1,000건을 넘고 홀몸노인이 132만 명이라 하니 정치도 민생의 삶이 최우선이라고 저렇게 소리 높여 아우성으로 걱정하나보다. 그래서 인간은 본정신이 외출을 하기 전까지 3,000번이나 우는 모양이다. 열반의 네 가지 덕(德)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하지만 두렵고 조바심이 날 때 크게 박수를 치고 웃으면 사랑이 꿈틀대지 않을까.
‘사랑’의 정의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에서 ‘남녀 간 그리움’으로 되돌려졌다고 한다. 사람이 중심이다. 사랑, 연애, 애정은 행위주체를 남녀로 되돌렸다는 사전적 정의가 뭐 그리 중요하랴. ‘사랑’이라는 한 단어를 말하는데 72개의 근육이 움직여야 된다고 하니 차라리 악수라는 이름으로 손을 내밀고 박수라는 이름으로 손뼉을 치면 입으로 말하는 사랑보다 값진 커뮤니케이션이 아닐는지. 
상대가 있을 때에 악수를 많이 하고 박수를 많이 쳐야 할까보다.
그렇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님이 떠나는 걸 우리는 보았다. 하늘이 천년을 빌려 준다면 그 천년은 당신을 위해 쓰겠노라고 아무리 악을 써도 하늘은 결코 세월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나고 동동구루무 한 통 다 못 쓰고 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노래를 부르면 무엇하리.
저울질과 계산서가 오고 가는 사랑이요, 로맨스라 해도 속진(俗塵)과 풍진(風塵)이 있어 초월이 있고 행복이 있다. 오늘도 초원에는 암컷을 향해 돌진하는 수놈의 얼룩말이 있고, 교미 때문에 죽는 흑산도의 수놈 홍어도 있다. 사랑은 아무리 진부하고 식상하다해도 사랑이다. 문학이나 영화나 음악이나 사랑이 들어가지 않고는 전개가 되지 않는다. 불륜이나 복수가 아니면 드라마가 되지 않는 시대라 해도, 사랑은 언제나 자기 본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 부딪히는 빗방울 하나, 해당화의 꽃잎 하나도 사랑이 아니더냐. 속삭이고 부딪히는 것이 사랑이요, 인생이다.
금생에 웃지 않는 자는 다음 생에 접수를 거절당할는지도 모른다. 악수와 박수, 그리고 웃음은 의사의 처방전이 없어 대형약국에서도 팔지 않고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해도 암거래마저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악수와 박수는 사인이 필요 없는 인문학이다. 신이 악수를 하고 박수를 치라고 두 손을 하사한 것이라면 신이 한 것 중에 제일 위대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두 손이 움직이고 두 발이 움직일 때 악수를 하고 박수를 치고 사랑을 하면 어떨까. 내일이면 늦을는지도 모른다. 악수와 박수는 오감의 엔터테인먼트요, 마지노선이 없는 삶의 방아쇠다. 악수와 박수는 말이 필요 없고 글자가 필요 없는 백지의 경전이다. 악수로 씨실을, 박수로 날실을 삼은 을미년의 초원에 함부로 뛰노는 양떼들보다 더 행복한 우리들이었으면 좋겠다.
남쪽 밤하늘에 도란도란 거리는 별들이 조물조물 무쳐 놓은 파란 봄나물 같은 이 좋은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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