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 지난 호에 이어

지금은 중단됐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시에 세 번 타종됐다고 한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1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없이 서라벌에 울려 퍼진 종소리였다.
에밀레종에는 총 1,03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종의 제작 시기, 동기, 의미 등을 소상히 밝히고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8명의 이름과 관직, 주종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모두 기록해놨다. ‘한림랑 김필중이 왕명을 받들어짓다’로 시작하는 이 명문은 앞머리에서 범종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해 진리를 알게 하듯 이 신종을 달아 진리의 원음(圓音)을 듣게 하셨다’
즉 종소리는 진리의 원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기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으로 옮기면 불상이 되듯이 부처님의 목소리를 옮겨놓은 것이 종소리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 그런 정성으로 이 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생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에 칩거해 ‘금오신화’를 저술할 때 봉덕사의 황량한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봉덕사는 자갈밭에 매몰되고/ 종은 풀 속에 버려졌으니/ 아이들이 돌로 차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주나라 돌북이 그랬다던가.

 

◈석조관음보살 입상

본래 이 보살상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따로 전하다가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몸체는 경주 낭산 서쪽 기슭의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다. 1975년 몸체를 조사할 때 그 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서 가져갔는데 그 모양새가 여기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로써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 중이던 보살 머리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몸체가 묻혀 있던 부근에서 연꽃대좌를 발견하게 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불상이 관음보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관음상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며 자비를 상징한다. 이 보살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 모습은 대개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고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이 불상의 경우 보관의 화불은 마모가 심해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석조불 입상
경주 양북면 장항리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장항리 절터에는 2기의 오층탑과 불상대좌가 남아 있다. 이 불상은 하반신이 없음에도 서 있는 입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크기가 대략 4.8m 옛날 척도로는 1장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이다.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 부처의 키가 1장6척이라고 전하기 때문이다. 불상이 언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상당수 불상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얼마나 비슷한지에 따라 시기를 결정한다. 어느 한 시기, 특정지역에서 비슷비슷한 불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불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상이다. 근엄한 표정의 얼굴, 건장한 신체, 사실적인 옷 주름 등이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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