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하나 되는 ‘박수’

 

 

악수는 장황한 산문시가 아니라 단 한 줄로 가슴에 울림을 주는 극서정시다. 살다보면 미움도 원망도 많고 재수 없는 날도, 운수 나쁜 날도 많다. 상처를 받은 사람도, 상처를 준 사람도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마음이 아프고 결릴 때는 한 장의 파스를 붙일 장소도 찾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악수는 영혼의 담금질이다. 가급적 살아 있는 동안 악수를 많이 하여 심장박동수를 고르게 하는 것이 밤에 잠이 잘 오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힘이 들 때 손을 잡아주고 악수를 할 사람이 있으면 성공이다.
출입문에 누구에게나 거부하지 않는 손잡이가 있어 참으로 좋질 아니하던가. 손잡이가 되어 줄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연말이나 연초가 아니더라도 각종 시상식도 많고 각종 모임도 많고 각종 스포츠도 많고 결혼식장도 많아 박수를 많이도 친다. 박수란 환영, 축하, 기쁨, 찬성 등으로 손뼉을 마주 두드리거나 치는 것으로 공감의 표시라고 한다. 많은 공감을 표시할 때는 강도가 높아 박수갈채라고 하질 않는가. 박수의 대상은 스쳐가는 순간의 ‘인증샷’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에덴이다.
우리는 2015 신년음악회를 보았다. 바이올린의 선율에 실린 요한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와 ‘근심 없이 폴카’라는 빠른 2박자의 왈츠를. 대한민국의 대표응원가라는 ‘평화의 아리랑’과 연합합창단과 KBS관현악단이 함께 한 웅장한 ‘한국 환상곡’을. 모두의 기립박수가 신명나게 두드리는 땀띠의 사물놀이가 아니더냐. 만유인력의 밑거름이 조화의 법칙에서였다면 박수는 조화의 선두주자다.
박수는 천년 사찰의 무궁도량으로 함께 들어가는 일주문이다.
너와 내가 하나로 융화된 원융무애요 원융회통이 박수다. 파유와 입공이 다르지 않다는 파립불이요, 쌍차와 쌍조가 다르지 않다는 차조불이며 화엄종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이 박수다.
모든 소리의 시작과 종점은 이런 박수소리였으면 좋겠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는 ‘국제시장’은 눈시울의 오열이 아니라 ‘함께’라는 박수다. 부부싸움을 하는 중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기립하여 손바닥을 가슴에 대는 아버지와 어머니.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배려라는 박수밖에 모른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칠 수밖에 없는 박수를.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박수를 배웠다. ‘엄마 앞에서 짝자꿍 아빠 앞에서 짝자꿍’도 ‘주먹 쥐고 손뼉 치고’도 배웠다.
박수는 또 다른 응원가요, 희망가다. 오선지에 담을 수 없는 고음이라 해도 꽃 중의 꽃이라는 박수에 누가 층간소음 데시벨을 논할 수 있으랴. 우리의 신명나는 사물놀이가 박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관객 천만을 넘긴 송승환의 ‘난타’가 정말이지 박수에서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닐까. 공연을 위해 칼 1만8,975자루, 도마 2,070개, 오이·당근 각각 31만2,900개, 양배추 21만9,030개, 양파 12만5,160개가 갑오년 말로 사용됐다고 하는 기사를 보니 가히 스탕달신드롬이다.
세마치나 굿거리장단의 경쾌함으로, 좀 더 빠른 자진모리로, 더 빠른 휘모리장단으로, 두드림의 미학이 박수다. 청군, 백군 운동회 때의 삼삼칠 박수나 국가 대항전 때의 ‘오 필승 코리아’의 박수는 함께 하는 멋진 리듬의 백미가 아닌가.
자연을 빼고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가 박수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멋진 시도, 멋진 노래도 박수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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