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는 소통이다. 사랑이 오고가는 오작교요, 구름이 오고가는 서해대교요, 바람이 오고가는 정암터널이요, 해와 달이 오고가는 만항재이다.
치열한 태클의 그라운드에서도 축구선수가 제일 먼저 하는 게 상대방과의 악수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링에서도 권투선수가 제일 먼저 하는 게 악수다.
온갖 협상테이블에서도 제일 먼저 하는 게 악수이며, 서로의 이익을 다투는 국가정상들의 모임에서도 제일 먼저 상대방과의 악수다. 교수들이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사자성어가 ‘정본청원(正本淸源)’이라 했던가.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한다는 뜻이란다.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아 근본을 바로 세우고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소통이다. 소통은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만 옳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리라.
하루 저녁에 같은 개울을 아홉 번이나 건넜는데도 건널 때마다 물소리가 다르더라는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도 있다.
소통의 본질은 말을 잘 하는 기술이 아니라 배려라는 진심이라 했다. 배려는 위험한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에서 발아되고 숙성되고 무르익어야 하리.
없는 말이 없고 없는 글자가 없는 이 요란한 사바세계에, 껍데기만 흉내 내고 인용하여 아는 양, 깨달은 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악보다 위선이 더 무섭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혜를 주는 산이라는 지리산의 천왕봉에만 지혜가 있고, 덕을 지녔다는 덕유산의 향적봉에만 덕이 있으랴. 지식은 많으나 지혜는 하나다. 원자자원(圓者自圓), 방자자방(方者自方), 장자자장(長者自長), 단자자단(短者自短)이라 하질 않던가.
둥근 것은 둥글고 네모난 것은 네모나며 긴 것은 길고 짧은 것은 짧다는 것을 알면 지혜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
뜻에 의지하되 표현에 속지 말라고 했다. 무늬만, 포장만 현란하도록 과한 수식어는 원형을 해치는 또 다른 뇌관이니 이러한 때에는 소통보다 외면이 좋다. 외면이 또 다른 소통인지도 모른다. 전화 한 통으로 당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제 아무리 못 받는 돈이라도 받아준다는 플랜카드가 있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는 광고가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라고 했나보다.
이형기의 낙화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된다.  소통은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한가 보다.
떠남에 관한 원각경의 4구게다. 지환즉리 (知幻卽離) 부작방편 (不作方便), 이환즉각 (離幻卽覺) 역무점차(亦無漸次). 환상임을 알면 곧 떠날 것이니 방편을 지을 필요도 없고, 환상에서 떠남이 곧 깨달음이니 수행도 필요 없다네.
악수는 예의다. 예의란 마음이라는 마인드와 몸이라는 보디가 결합하여 일구어내는 존경의 표시가 아닌가. 비록 한 손으로 하는 악수일지라도 악수에는 몸가짐이 있고, 말투가 있고, 영혼이 있고, 진심이 있어야 하리라. 한손은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 악수를 하는 건 명품이 아닌 짝퉁이요 품격이나 인격이 떨어지는 민망한 자세다.
큰 노름꾼이 남은 밑천을 다 걸고 최후의 승부를 거는 고주일척(孤注一擲)에도 속임수가 없다는 빈손의 예의바른 악수로 시작한다.
한손으론 부족해 두 손을 맞잡고, 맞잡은 두 손을 어찌할 줄 몰라 아래, 위로 흔드는 저것을 사랑의 변곡점이라고 해야 할까, 임계점이라고 해야 할까.  
악수 한번으로 가슴이 떨리고 서운했던 마음이 풀어지며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 계기가 된다면 악수는 희망의 지렛대요 삶의 메타포이며 인생의 나침반이다. 악수는 대장간의 불꽃을 일으키는 풀무질이요 깊은 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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