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홍난파는 동경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1931년 여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한 난파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작곡이론을 배웠다. 힘겨운 미국생활 중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쳐 귀국 후에도 늑막염으로 입원할 만큼 큰 병이 돼 젊은 나이에 생애를 마치는 원인이 됐다. 그후 1933년 귀국해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유가 됐으며 이 시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곡 ‘봄 처녀’, ‘고향생각’, ‘사랑’, ‘햇볕은 쨍쨍’, ‘개구리’ 등을 작곡했다.
난파는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실내악단 창시자며 최초의 음악평론가이며 최초의 음악잡지 발행인, 최초의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서 근대음악을 개척했다. 그리고 창작음악의 선구자로서 한국 창작음악의 수준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렸으며 창작동요, 창작기악곡을 개척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봉숭아(원래 제목은 봉선화)를 비롯해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과 같은 가곡과 고향의 봄,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등의 동요가 있는데 이 노래들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 목면산* 아래 고토(古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을 버리고 어데 가서 살겠단 말씀입니까?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하와이를 가봐도 내 땅만 못했고 사시(四時)를 통하여 백화가 경염(競艶)하는 로스엔젤리스에 가봐도 내 땅만은 못했고,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대도시 시카고에 오래 있어 보았으나 자고 깨면 생각은 고향뿐이었고, 지금은 세계적 대도시가 된 동경에도 전후 10여년을 지내 보았지만 또한 내 땅만 못하더라.
그밖에는 별로 가 본데가 없는지라 혹시 이 다음에라도 거기서 살고 싶음직한 어느 곳이 있을지는 모르지요 마는 살다 살다 못살고 쫓겨나는 한이 있기로서니 내 땅을 버리고서야 그 어드메에 가서 사오리까?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이야말로 내가 살지 않으면 아니 될 고장입니다.
나는 여기에 살 의무가 있고 나는 내 땅에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외에 나가서 살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고토(古土) 안에서는 어디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이냐는 말씀이지요? 같은 서울 안에선들 일생을 같은 동 같은 번지 같은 문안에서만 살지는 못하는 이상 어디인들 싫다 하오리까마는 그래도 원산지만은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면산이 내 집 앞 산이요, 한강이 내 집 앞 물인데 이집 이산 떠메고 가지 못할 바엔 나는 서울서 화토(化土)하고 말겠습니다.
*목면산: 남산
 

◈ 월암공원
주변이 재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으나 정원과 이어진 월암공원을 올랐다. 몇 곳에 선생의 노래가 철판에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벤치에 앉아 마음 속으로 가만히 고향의 봄을 노래해보니 마치 내가 어린시절로 마구 달려 가고 있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홍난파 선생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노래도, 교육도, 문학도, 바이올린 연주도, 방송도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미안한 마음에 홍난파 선생을 좋아한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 외쳐 보자. 홍난파 선생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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