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홍난파 가옥에서는 연주회나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난파 홍영후는 남양홍씨 토흥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후이고 널리 알려진 ‘난파’는 난이 피어 있는 언덕이라는 뜻의 호이다.
맏형 석후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했고 난파도 20세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음악에 뜻을 두고 1년도 안돼 부친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했다.
홍난파가 서양음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였다. 당시 기독교는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난파의 사촌형인 재후와 조카인 재유, 은유, 성유, 지유 등이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 것도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난파는 새문안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성가대에서 활동했다. 조카들과 함께 때로는 선배이자 동료이며 때로는 사제 간으로 지내면서 많은 연주회를 함께했다. 은유, 성유는 난파가 조직한 연악회(硏樂會) 제1회 수료생이고 성유는 난파가 다녔던 동경고등음악학원 1년 후배이자 난파트리오의 일원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관 중학과 재학 중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해 숫자보(數字譜)로 ‘도레미법’을 배웠다. 그리고 전문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학부 성악과에 입학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인 서양음악교사 김인식의 지도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16세 때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열린 성탄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것이 난파의 첫 무대였다. 이후 여러 연주회에 초청돼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홍난파는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한 직후 서양악부 교사로 근무하면서 ‘악전대요’, ‘통속창가집’, ‘간이무답행진곡집’ 등을 출간했다.
또 동경음악학교 재학 중 예술잡지 ‘삼광(三光)’을 출간했으며 창간사에서 “우리 조선은 깨는 때올시다. 무엇이던지 하려고하는 때올시다”라며 음악을 통한 실력 양성과 신문화의 수용을 주장했다.
1920년부터 신문과 잡지를 통해 서양음악과 음악가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리고 음악연구단체인 연악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난파는 이 시기에 소설, 문학, 번역 등 각 부분에 걸쳐 열정적으로 글을 발표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해 전문적인 음악비평과 세계음악가 평전, 악기 및 악곡해설 등의 계몽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