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여행 떠나GO!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거제 지심도, 여수 오동도,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서천 춘장대로. 꽃을 피우며 올라가는 동백꽃은 남도의 겨울 문턱에서부터 피기 시작한다. 새하얀 눈이 가득 쌓이는 날. 푸른 잎과 붉은 꽃은 절묘한 빛으로 대비 돼 오고 모든 꽃들이 잠을 자는 겨울에도 선홍빛 꽃을 피우니 동박새는 꿀을 찾아 날아든다. 경상도와 전라도 겨울 바닷가는 그래서 풍요로워 보인다.
해마다 이른 봄 강진 백련사 뜰. 다산 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엔 뎅거덩 떨어진 동백꽃들로 붉은 주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 “땅끝에 왔습니다 /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 저녁 파도 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고은 시인은 “땅끝” 시에 삶의 여정을 담담히 담아냈다. 끝은 끝이 아니라 바다 저편으로 다시 갈수 있는 시작이었음을. 그 건너 망(望) 끝 어느 섬에서 벌써 봄이 시작 되고 있다는 것을.

 
세상 밖인 듯 아름다운 선경

윤선도는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다해 제주도로 떠난다. 항해 중 수려한 봉을 보고 보길도의 격자봉에 올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 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감탄했다.
격자봉이 완만히 내려앉은 곳에 집들을 지어 낙서재와 곡수당으로 이름 지었다. 그 곳에서 제자들과 책을 읽고 맞은편 동쪽 산 암릉에 신선도 머물다갈 방 한 칸짜리 석실을 만드니 동천석실이다. 그리고 그곳의 지형들이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해 부용동이라 불렀다. 그 곳은 격자봉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자연스럽게 머물다 흐르도록 주변의 바위와 산세를 그대로 살려 만든 조선시대의 가옥과 정원이 자연과 하나가 된 한국의 대표적 원림(園林)이다. 원림은 동산과 계곡 등 자연을 크게 방해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자연을 그대로 들여 놓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이다. 세연정이 있는 연못은 봄이면 붉은 동백꽃으로 물든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 쌓여있어 바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윤선도는 이곳에 머물며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지어 시인묵객의 삶을 산다. “앞에는 만경유리 뒤에는 천렵옥산 / 어여차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어부사시사 중에 겨울의 한 소절이다. 어부사시사는 춘하추동 각 10수씩 어부들의 사계절 상을 읊은 한글로 된 연작 가사다.
보길도는 2008년 노화도와 연결한 보길대교를 통해 조금 더 육지와 가까워졌다. 전복 사업으로 부촌이 된 노화도의 산양항 이나 동천항을 거쳐 보길도로 진입한다. 섬의 동쪽에 반달모양으로 이뤄진 예송리 해변은 작은 깻돌들이 바닷물에 자그락대며 후박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등 수 십종의 상록수림은 방풍림과 어부림의 역할을 하고있다. 그 오래된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40호로 지정 됐다.
예송리 언덕을 넘어 동쪽으로 통리 해변을 따라 가면 섬의 끝자락 선백도에는 “여든 셋 늙은 몸이 /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있구나” 한시로 암각 된 글씐바위가 나온다. 남인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난 우암 송시열이 83세에 제주도로 귀양 가다 태풍을 만나 백도리 해변 석벽에 자신의 심경을 새겨 놓은 곳이다. 남인의 수장 고산 윤선도가 수 십 년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 난 것이 81세고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에 눈을 감으니 서인과 남인의 발자취가 새겨진 보길도의 인연이 아이러니하다. 숙적인 두 거두는 말년에 수 십 년간 쌓아 놓은 인생의 짐들을 이 섬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 비단을 편 듯 고요한 물결은 햇빛에 찰랑일 뿐이다.
보길도는 청각과 낭장망으로 잡은 멸치가 유명하다. 조류가 거센 보옥리 앞 바다에 그물을 쳐서 잡는 전통방식의 멸치잡이가 낭장망이다. 섬의 서쪽 마을 보옥리의 뾰족하게 생긴 보족산(195m)에 오르면 멸치를 말리고 있는 마을 풍경과 푸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공룡알해변이 내려다보인다. 커다랗던 돌들은 오랜 세월 거센 파도에 구르다 공룡 알 같이 둥그런 깻돌 들로 만들어져 동백나무 숲과 함께 방파제 역할을 한다.
해변을 지척에 둔 불무섬은 파도가 치는 날 햇빛에 반사된 물보라가 마치 불이 난듯해 붙여진 이름이다. 보길도는 수 백 년 된 동백나무들이 마을 마다 방풍림을 이루며 초겨울부터 봄까지 꽃이 질 줄 모른다.
보옥리 가는 길에 서있는 황칠목 한그루는 국내 최대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 됐다. 황칠목은 금빛 색깔을 내는 천연 도료로 과거 외세가 탐내는 수탈 물품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볼 수 없는 나무다.
예송리의 일출과 선창구미의 일몰이 아름다운 보길도는 눈이 오는 겨울의 풍광을 “맑은 유리 바다와 천 겹이나 둘러싸인 백옥 같은 산”으로 노래돼 왔다. 예송리와 부용동. 보옥리로 이어지는 3시간 남짓한 격자봉(433m) 산행은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 칭송하니 곧 ‘세상 밖인 듯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담아내는 보길도 여행의 숨어있는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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