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의 고장-경북 청도 (3)

박영수의 문화유산답사기 박영수l승인2013.05.08 15:44:00l8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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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산은 화랑들의 수련도장

운문산 오갑사는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곳이라고 운문사 사적에 기록돼 있다. 5갑사는 원광법사가 환국하기 36년 전에 창건됐는데 그 창건주가 전해지지 않은 것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오갑에 원광법사와 같은 그 시대 최고의 학자요, 고승이 주지했다는 점과 이곳에서 이뤄진 일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불과 36년의 세월에 그 창건주를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운문산 오갑사는 그 출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찰과는 다른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불교의 경우 사찰의 창건은 당연히 당대 고승대덕의 이름으로 이뤄지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운문산 오갑사의 법통을 밟아 올라가면 창건주는 원광법사일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원광법사 이전에 이미 가슬갑사를 비롯한 오갑사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뤄 볼 때 오갑사의 창건이 신앙으로서의 사찰과는 다른 목적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깊은 산 속에 이러한 시설을 마련했다면 그것은 신라의 통치세력 이외에 달리 상정하기 힘든 것이다. 더욱이 문헌에 남은 가슬갑사의 역사적 역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속오계의 제정과 점찰법회의 창설이며 이 두 가지는 다 신앙보다는 교육의 인상이 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국가와 민족에 공헌할 인재를 교육하기 위해 마련된 시설이었다는 심증이 굳어진다.

1)가슬갑사를 비롯한 오갑사의 기능

▲호거산 운문사 종각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최단거리로 산길을 누벼 와도 백제에 가까운 이 운문사에 어째서 당대의 고승 원광법사를 머무르게 했을까 하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원광이 가슬갑에 머물고 있을 때 경주에 있는 황룡사에서 열린 백좌도장에서 원광에게 맨 윗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니 이는 원광법사가 환국한 13년 후가 된다. 이와 같이 가슬갑의 기능이 황룡사와 같은 것이었다면 중국에서도 고승대덕이요, 학자로 이름난 원광법사를 더구나 왕명으로 불러서 곧 바로 원격한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오갑사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삼국유사의 기록에 진평왕을 비롯한 왕실의 추앙이 당대 신라의 고승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라는 점을 아울러 생각할 때 원광법사는 단순히 불교의 승려로서 사찰의 주지를 맡아 가슬갑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 명백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가슬갑을 비롯한 운문산 오갑사는 불교의 발전보다 더 절실하고 근원적인 발전 즉 국가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국가의 시설이었을 것이다.

2)오갑사의 사상적 배경

가슬갑사를 비롯한 오갑사는 종교적 시설이라기보다 교육시설이며 승려와 불교를 위한 강당이라기보다 국가발전을 위한 불교의 공헌이 수행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가슬갑사에서 이뤄진 화랑의 생활신조 확립과정에서 원광법사는 “그대들은 나라의 신하이니 불교수행의 보살계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며 세속오계를 전수했는데 그중 다섯째 살생유택을 가리키면서 이는 세속의 선계(善戒)라고 한 것은 그 교시의 장소인 가슬갑의 특수성과 주지하는 원광법사의 정신자세를 능히 살필 수 있는 증언이 될 것이다.
불교 신도의 첫 계율은 부살생계(不殺生戒)로 돼 있다. 그럼에도 고승 원광은 살생을 가려서 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살생은 해도 좋다는 뜻이며 곧 살생을 시인하는 중대한 발언이다. 이 발언의 현장이 오로지 불타의 가르침을 받들고 펴나가는 일반 사원이라면 그 자리에서 당대의 고승이 배우러온 사람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들려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광법사의 이 태도는 국가발전의 선봉이던 화랑을 가르치는 자리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608년(진평왕 30년) 진평왕으로부터 수나라 양제에게 고구려를 토벌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짓도록 왕명을 받았다. 이때 원광은 “자기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없애는 일은 승려가 할 일이 못됩니다. 하오나 소승은 대왕의 땅에 살며 그 땅에 나는 것으로 식음하고 있사오니 명을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걸사표를 지어서 바쳤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증언은 원광법사가 젊은이들을 위해서 그 시대의 역군이 지켜야 할 생활신조를 가르친 정신자세는 원광 자신을 위한 수행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하는 중생의 제도를 위해 헌신하므로 더욱 깊고 참된 보살도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다음 호에 계속


 박영수  webmaster@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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