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권 영 걸 교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거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그 형태가 너무 단조롭고 획일화돼 있다. 이렇게 아파트가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자리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성냥갑 아파트의 디자인 혁신은 가능할까?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생태주의 이념에 기초한 디자인 기본 원칙을 담은 ‘지생가(地生家)’라는 디자인 방향을 제시하고 새롭게 짓는 아파트에 적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LH가 짓는 공동주택 디자인을 맡은 서울대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권영걸 교수를 만나 LH 공동주택 디자인에 담은 의미와 앞으로 공동주택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인간·땅·집의 상생 실천하는
모범 디자인 제시 

 
▲ LH에 적용할 핵심가이드라인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전경
“이번 LH 공동주택 디자인은 대한민국 주거문화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라고 권 교수는 말한다.
권 교수는 “지난 20년간 브랜드 아파트가 난무했고 화려하고 귀족적인 주거양식과 진정한 삶의 가치보다 외형적인 허세를 추구해온 국내 주택시장에 이제는 자성이 필요한 시기”라면서 “이런 의미에서 과도한 상업주의적 흐름에 맞서 국민의 건강하고 쾌적한 삶을 영위하고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진정한 ‘참살이 주거문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중점을 둬 아파트 디자인을 실행했다”고 설명한다.
이제까지 공동주택을 투자가치로만 바라보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서 집과 땅이 상생하는 틀에서 설계돼야 한다는데 이념을 담고 모든 디자인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후 LH 디자인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권 교수는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권 교수는 건축디자인, 외부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 시설물디자인, 야간경관디자인 등 5개 분야별로 나눠 팀을 꾸리고 아파트 단지 출입구부터 공원, 계단, 조경, 단지 내 시설물 등에 대한 정밀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나갔다. 디자인 가이드라인에는 원가 절감에서부터 자연성에 기초한 건강한 주거공간을 위한 절제된 디자인 지침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탄생한 디자인 이념이 ‘지생가(地生家)’인 것이다. 지생가는 ‘땅이 집을 낳는다’, ‘땅과 집은 하나다’, ‘집과 땅은 상생하는 틀에서 설계돼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LH는 대한토지공사(地)와 대한주택공사(家)가 합병돼 유기적인 한 기관으로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 교수는 “LH는 오랜 기간 서민주택을 공급하고 발전시켜온 한국 주택시장의 맏형 격인  만큼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공동주택 시장에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가야 한다는데 의미를 두고 인간, 땅, 집의 상생을 실천하는 공동주택의 모범 디자인을 제시한 것”이라고 전한다.
 
 
 
쾌적하고 건강한
초록의 삶이 있는 주거설계
 
 
권 교수는 “이번 설계를 하면서 화려한 장식이나 시각적인 허세를 전혀 부리지 않고 입주민이 건강하게 주거문화를 이뤄 나갈 수 있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려했다”고 말한다.
지생가의 디자인 비전 아래 주변 녹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초록이 보이는 지붕은 삼각형의 경사지붕으로 설계됐고 불필요한 장식요소가 배제된 단정한 입면의 건축물로 구현된다. 또 저층부를 기피하는 현상을 보완하기 위해 저층부를 화려한 색채와 마감재로 치장하지 않고 저층부의 형태와 층고에 변화를 줘 입주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권 교수는 여기에 종래의 폐쇄적이고 어두운 비상계단실을 과감하게 넓은 유리면을 적용해 햇빛이 들어오는 밝은 이동공간으로 조성하고 실내조경을 해 입주민이 자연스러운 만남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현란한 옥외광고는 배제하고 고층 아파트에서는 엘리베이터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었던 계단 공간의 벽을 유리소재로 만들어 밝은 빛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이 계단 공간은 화단으로 꾸밀 수도 있다.
권 교수는 “계단은 피난용도로, 복도는 엘리베이터 홀 앞의 자투리 공간으로만 취급받고 있을 뿐 전혀 디자인 고민을 해야 할 디자인 요소로 인정받지 못하는 죽어 있는 공간으로 취급돼 이 공간을 활용했다”고 말한다.
단지 내의 외부공간은 생태주거단지 ‘지생가(地生家)’의 디자인 비전이 더욱 구체화된다.
형식적인 환경설계로 입주민의 실생활과 단절돼 있던 외부공간은 보다 적극적으로 건강과 참살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집 앞에 펼쳐진 넓은 초록광장은 입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내 집 앞마당이 된다. 단지 내에 조성되는 참여정원은 직접 재배한 채소와 허브향이 있는 커뮤니티의 활동장소다.
“이렇게 자연을 관조의 자연에서 참여의 자연으로 변화시켜 입주민이 도시 속의 농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권 교수는 표현한다.
단지 외부와 내부를 차단시키는 높은 방음벽과 옹벽 구조물은 담으로 구분하지 않고 나무로 둘러싸인 둘레길을 조성해 자연스럽게 구분했다. 단지 내 공용공간에는 잔디 광장을 만들어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거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차가운 재료의 인공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어린이놀이시설은 일반 공동주택에서 흔히 보는 알록달록한 페인트로 칠해진 차가운 철재와 합성소재의 시설물 대신 나무와 돌, 흙으로 꾸며진 놀이공간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를 스스로 디자인하며 자연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과잉 디자인의 입구 게이트 구조물 대신 단지를 상징하는 나무들이 일렬로 서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권 교수는 “일렬로 서 있는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설 때면 삭막했던 도시모습에 피로했던 눈이 정화되고 그 사이로 다른 자연 경관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설계에는 철두철미하게 자연성에 기초해 입주민의 생태성과 거주성, 쾌적성을 담았다”고 말한다.   
 
 
 
화려한 브랜드 중심 아파트에
일격을 가하다!

 
권 교수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참살이 주거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연과 땅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주거를 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그동안 껍데기로 경쟁해 왔다”면서 “시각적인 질과 멋진 외관에만 열중했고 자산 가치 증대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지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공간으로 인식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디자인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파트 디자인 설계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건설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아파트 시장에서 안전한 수익성을 낼 수 있는 것에만 열중한 나머지 디자인 매뉴얼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에코아파트’, ‘그린아파트’ 등 그린디자인을 지향하는 아파트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막상 내부를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권 교수는 평가한다.
권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에 임하면서 항목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카테고리별로 10계명을 정하고 설계자와 시공자에게 이를 숙지시켜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기존의 아파트 디자인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이번 설계가 공동주택 주거문화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자부한다”고 당당히 밝힌다.
여기에 입주민 역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화려하고 멋진 아파트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공간에서 건강한 삶을 살고 텃밭을 가꾸고 공동체 간에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곳이 아파트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입주민의 자부심을 형성해 주는 것까지가  디자인의 마지막까지 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권 교수는 말한다.
이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 아파트의 디자인을 맡은 교수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를 바꾸는 사회문화운동가로서의 마음가짐과 사명을 갖고 임했다”면서 “이번 디자인 비전을 통해 LH 아파트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초록의 삶을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지향점을 찾을 수 있길 바라고 앞으로도 참살이 주거문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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