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30만 일자리, 중장년층 찾는다

 

김연미 관리사무소장
김연미 관리사무소장

꽃사과 나무의 열매에 붉은 기가 살짝 돌기 시작했다. 추석도 지나고 그 험한 태풍도 잘 넘겼으니 이제 제대로 익는 일만 남았다. 일이년 사이에 키를 늘인 가느다란 가지에 마치 물방울처럼 오종종종 매달린 열매들이 경쾌하다. 힘든 고비를 잘 넘겼으니 ‘나 대견하지?’ 하는 표정이다. 그 표정에 무한한 긍정의 얼굴로 답을 해 본다. 

역대급 초강력 태풍이란 수식어를 달고, 시시각각 올라오는 힌남노의 경로를 확인하며 태풍과의 일전을 준비했었다. 태풍의 길목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을 하는 이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다. 

태풍대비 매뉴얼은 이미 체화된 지 오래여서 어렵지 않게 대비를 마쳤다. 변수만 없다면 괜찮다 생각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낮도깨비 같은 변수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참 많이 느긋해졌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태풍이라는 것에 마음을 졸이고 태풍이 지나고 나서 남아 있는 것들과 시선을 맞추며 살아온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넘었다. 

이립(而立), 뜻을 세우는 나이 삼십대 초반에 주택관리사의 길로 들어서서 지천명(知天命),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뜻을 알 나이, 오십이 되고도 대여섯 해가 지났다. 내가 세운 뜻과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뜻은 같은 것이었을까.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주택관리사의 길을 걸어가는 내게 사람들은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오곤 했었다. 나 자신도 이게 맞는 길일까 고민하기를 수차례. 가끔씩은 주택관리사의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보겠다고 일탈 아닌 일탈을 하기도 했었다.

도시의 골목을 걷다 마주친 목련꽃 송이에서 내가 두고 온 아파트의 목련꽃 안부가 궁금해졌다. 무심코 걷던 내 발길에 걸린 낙엽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쓰레기처럼 쓸어내던 아파트의 낙엽들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슴에 상실감이 가득 차오를 즈음이면 나는 어느새 또다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비가 온 뒤에 더욱 굳어지는 땅처럼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나 보다. 조그마한 일에도 허둥거리며 일희일비하던 감정의 반동 폭이 많이 가라앉은 걸 보니 말이다. 

관련법은 물론이고, 시설, 소방, 회계, 조경, 심지어 노무관계와 입주민 상대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통달해야 하는 이 버겁기만 했던 주택관리사란 직업. 이제는 오히려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어서 더 재미있다. 세계는 넓고 그 넓은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만큼 행복한 경험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게 억울할 때가 많다. 그 억울함이 조급증을 만들고, 그 조급증은 사람의 시야를 좁게 한다. 그래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그게 편견과 아집을 만든다.

오십을 넘기면서 나한테서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가능하면 새로운 것을 해 보려고 한다.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증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에 24시간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타면 아름다운 사진과 시(詩)가 있는 아파트를 만들었다. 입주민들이 참 많이 좋아했다. 음악 한 곡, 시 한 구절이 스스로의 품격을 올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입주자대표회의 시간에는 종이 자료를 없애고 PPT를 활용해 회의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아파트 구석구석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해결책이 더 빨리 나오게 됐다. 직원들과의 업무전달은 SNS를 이용한다. 업무전달 속도가 빠를뿐더러 언제든지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아파트에서 진행되는 각종 선거 및 투표에도 모바일이 활용된다. 

많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이렇게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아날로그적이다. 아파트를 관리하는 방식은 최첨단 시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젊은 관리사무소장, 젊은 사고와 기술을 가진 소장이 필요한 대목이다. 

내가 처음 소장을 할 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다. 자료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그런 시절을 거쳐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다. 

내가 세운 내 삶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시작했던 주택관리사. 울고 웃고 부대끼며 20여 년을 살다 보니 이제 하늘이 내게 내린 뜻이 여기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물방울처럼 매달린 꽃사과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직원들의 단체 채팅방에 올라오는 작업 사진과 더불어 이번 달 입대의 회의 중 아파트 현황보고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 눈 뜨면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오는 입주민들에게 본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는 것도 소장의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꽃사과의 붉은 빛이 더 짙어지는 것 같다. 나도 저 꽃사과처럼 잘 익어갔으면 좋겠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