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비 흩날리는 담양의 여름

가사문학의 산실인 정자 모여있어

담양은 정자원림의 고장이다. 명옥헌,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 독수정 등 가사(歌詞)문학의 산실이 됐던 정자가 모두 이 지방에 있다. 지금의 광주호 주변을 가사문학권으로 분류한다. 

가사는 조선에서 시조와 함께 처음에는 노래로 불렸고 양반 여자들 사이 유행했다는 문학양식이다. 광주호는 광주북구와 전남 담양의 경계에 있다. 무등산의 물이 광주호를 거쳐 중앙천으로 흐른다. 

지금처럼 수몰되기 전에는 ‘자미탄(紫薇灘)’이라고 불렀다. 자미탄(紫薇灘)은 수면에 떨어진 배롱나무 붉은 꽃송이의 아름다운 여울을 표현한 것이다. 붉은 꽃이 피는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동안 피어있다고 목(木)백일홍이라고도 부르며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한다. 

담양의 여름은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물든다. 주로 서원이나 사찰 경내에 심어진 배롱나무는 늦여름 꽃이 질 때면 붉은 꽃비가 돼 정원 곳곳에 흩날린다. 떨어진 꽃잎이 고즈넉한 연못 위에 내려앉으면 붉은 융단으로 연못을 물들인다. 그 옛날 빨간 꽃 흐드러진 자미탄과 정자가 있는 원림(園林)이 그려진다. 

자미탄으로 흐르던 한 여름의 배롱나무꽃. 뒤로는 명옥헌 원림 [사진 출처 : 담양군]
자미탄으로 흐르던 한 여름의 배롱나무꽃. 뒤로는 명옥헌 원림 [사진 출처 : 담양군]

지금 여름의 명옥헌 원림에는 수백 년 된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이다. 명옥헌은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는 정원이다. 담양 지방의 정자원림 중에서도 배롱나무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원림은 자연을 그대로 살린 한국의 고유정원이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또 다른 자미탄 주변에는 소쇄원이 있다. 소쇄원은 한국의 3대 원림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다 잠시 머물며 마음을 쉬어간다. 주변에는 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등이 모여 있다. 

소쇄원 원림. 광풍각 [사진 출처 : 담양군]
소쇄원 원림. 광풍각 [사진 출처 : 담양군]

 

식영정은 ‘그림자도 쉬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자의 그림자 우화가 있다. 

“어떤 이가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해 떨쳐내려고 도망쳤다. 더 멀리 도망칠수록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은 자신의 달리기가 느리다고 여겨 쉬지 않고 질주하다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다.” 

그림자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이야기 속 그림자는 욕망이다. 식영정은 세속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에 편안하게 기대는 장소라고 한다. 식영정에서 현대의 온갖 욕망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떨쳤으면 좋겠다.

 

잠시 속세떠나 정철 ‘성산별곡’ 노래

송강 정철이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 살 때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 식영정을 중심으로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을 칭송하고 계절의 변화를 노래했다. 그것이 ‘성산별곡’이다. 

성산은 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주변으로 지금의 담양군 지곡리 일대를 일컫는다.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속에 잠겨버렸다. 

매화와 복숭아 꽃 날리는 무릉도원, 신선한 바람에 묻어오는 연꽃 향,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밤의 정취는 그대로 있다. 눈보라 속 은밀한 설경에서 은둔한 선비가 누린 성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취가 남아 있다. 이곳을 찾는 이 또한 선비가 돼 세속을 잠시 떠나볼 수 있다. 

죽녹원 대숲에서 하늘을 보다.
죽녹원 대숲에서 하늘을 보다.

 

담양읍의 담양천을 끼고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의 대숲이 ‘죽녹원’이다. 죽녹원은 2003년 5월에 조성된 약 31만㎡의 공간이다. 울창한 대나무숲과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의 정자문화 등을 볼 수 있는 시가문화촌으로 형성돼 있다. 담양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숲길로 들어선다. 푸른 대나무숲을 들여다보고 돌아가는 모퉁이길. 햇빛 한 점이 바람에 팔랑이는 댓잎사이를 비춘다. 이처럼 촘촘한 나무들을 보았는가. 쪽 뻗은 푸른섬광이 질서 있게 군무를 이루며 점차 연녹색 오로라처럼 하늘로 흩어진다. 그 나무 틈새엔 정갈함마저 가졌다. 

 

천혜의 숲길 걸으며 초록에 물들다

어두운 대숲에서 하늘을 보면 이파리 사이로 푸른 하늘이 둥그렇게 보인다. 대나무 숲 촘촘한 좁은 공간에도 빛이 들어온다. 바람이 지나는 길도 있고, 너구리나 오소리가 드나들 길도 있다.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대나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푸른 댓잎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는 기분 또한 신선하다. 

그렇게 죽녹원의 8개 숲길을 지나 담양천을 건너면 국수거리의 시작이다. 아름드리나무 옆으로는 국수집의 노천식 의자들이 담양천의 풍경과 나무 그늘의 시원함을 배경으로 손님들을 맞는다. 세련되지 않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나는 시골장터 분위기다.

이곳이 관방제림의 시작이다. 예로부터 산록이나 수변 또는 평야지대에 임야구역을 설치하고 보호해 특이한 임상을 갖춘 곳을 임수(林藪)라고 했다. 임수는 전남에만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관방제림’이 대표적이다. 

관방제림
관방제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거리의 200여 그루 노거수들은 200년에서 400년이 됐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약 1㎞에 걸쳐 서 있다. 절반 이상의 나무가 푸조나무며, 느티나무, 팽나무 등도 많다. 

담양천의 범람으로 수해를 입자 조선 인조 26년(1648) 부사 성이성(府使 成以性)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제방을 축조(중수)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제방 양옆 아름드리 고목들은 생김새와 크기, 모양이 모두 달라 나무를 보며 걷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나무에 가려 휘어진 듯 보이는 제방길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묻혀있다. 나무의 공간이 길이 되고 나무의 모습이 이야기로 다가오니 시원한 바람과 나무의 넉넉한 품에서 마음이 넓어지며 호기로워진다. 

메타세쿼이아숲길
메타세쿼이아숲길

 

관방제림의 끝에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이어진다. 20여 m 높이로 짙푸른 가지를 하늘로 뻗치는 아름드리나무들이 길의 끝에 맞닿아 있다. 싱그럽게 풍기는 나무 냄새. 여행의 기대감은 이미 초록에 물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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