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으라는 소환장이 왔다. 3년 전에 근무했던 아파트에서 기존 동대표와 새로 선출된 동대표 사이에 고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관리사무소에 근무했던 관리사무소장의 진술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소환통지를 받은 후부터는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소환통지서 한 장이 일상적인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아파트 관리업무는 물론 개인적인 생활의 리듬마저도 완전히 깨졌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는데 조사받을 걸 생각하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러나 불응할 수가 없다. 소장이라는 직책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일했는데 이런 일까지 당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경찰 조사 과정 중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는 TV 속 장면 등이 떠오르면서 별별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들었다.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해당 아파트에서 근무할 때 사용했던 업무수첩 두 권을 들고 경찰서에 갔다. 

“소장님, 경찰서에 더는 출두할 일 없습니다. 소장님 업무수첩에 있는 내용이 고발 사건을 다 풀어줬습니다.” 

조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한 말이다. 그는 정해진 양식대로 조사를 끝내고, 그 당시 도색공사 계약금과 중도금을 과다 지급한 것처럼 보였던 이유와 정당한 지급 절차가 적힌 업무수첩의 내용을 복사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얽히고설켰던 어두운 감정이 한꺼번에 다 녹아내렸다. 업무수첩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A소장은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지부 모임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같은 지역의 B소장에게서 이런 끔찍하고 실제적인 경험을 들었다. 그때 기록의 중요성과 업무수첩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그날 이후 A소장도 모두 기록했다. 아파트 관리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은 일이나 어렵게 해결한 일들이 수첩에 쌓여갔다. 도색공사나 승강기 교체공사와 같이 큰돈이 들어간 공사, 갈등 요소가 많았던 동대표 선출 내용은 더 상세하게 기록했다. 고질적이고 반복적인 입주민 민원 내용도 동호수로 구분하고 일시를 구분해서 기록했다. 아파트를 관리하는 일의 끝은 행위를 마친 때가 아니라 기록을 마친 때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렇게 기록하다 보니 일하는 도중에 느끼지 못했던 점을 많이 깨닫게 됐다. 큰 문제라고 지레짐작해 겁먹었던 일도 기록하고 정리하다 보니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일하면서 부딪쳤던 동대표나 입주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경험도 했다. 

또 기록하는 내용 중 반복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문서 파일로 작성해서 언제 어디서든 컴퓨터나 휴대폰에 꽂아 열어볼 수 있도록 USB에 보관했다. 부피가 꽤 됐다. 그 안을 열어보면 아파트를 관리하는 일의 절차와 결과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의 향방을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는 USB를 열어 단축키로 검색하고 그걸 참조해서 해결 방향과 해결 시기를 결정했다. 

아파트 내 소음에 항의하는 입주민이 있었다. USB를 열어서 민원을 제기하는 입주민의 ○동○호를 검색해봤다. 화면에 뜬 과거 기록 내용으로 그 입주민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사례와는 반대로, 소음 발생 원인보다는 소음 문제를 제기한 입주민의 예민한 성격에 무게중심을 두고 소음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USB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업무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간단히 끝낼 일을 큰일로 만들거나 그리 크지 않은 일을 심각한 일로 만드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순간을 절대, 절대 잊지 못할 거요.” 왕이 말했다. “아뇨, 잊어버리실 겁니다. 적어두지 않으신다면요.” 왕비가 말했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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