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왕비의 능 ‘정릉’

정릉 능침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릉 능침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동안 구리, 고양, 파주 등 주로 서울 밖 경기 지역에 있는 능들을 둘러봤는데, 오늘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능 한 곳을 찾아간다.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이다. 서울에 정릉이란 이름의 능 두 기가 있다.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貞陵)과 강남 한복판 선·정릉 내에 있는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오늘은 앞의 정릉을 살펴본다.

조선의 도읍 한양(漢陽)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지금의 서울에 비하면 매우 좁았다. 동·서·남·북으로 난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의 안쪽 지역을 뜻하는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 10리(약 4㎞) 이내 지역을 말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가 한성부에 해당했다. 강남 등 오늘날 서울의 많은 지역이 조선시대에는 모두 성외(城外) 지역으로 경기도였다.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에 소재한 헌·인릉(서초구), 선·정릉(강남구), 태·강릉(노원구), 의릉 및 정릉(성북구) 등도 조선 당대에는 모두 도성 밖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고려 때부터 도성 안에는 능묘를 쓰지 못하게 했던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정릉은 원래 도성 한복판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이전에 두 명의 정실부인을 뒀다. 훗날 신의왕후가 된 한 씨와 신덕왕후 강 씨다. 이는 왕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중혼을 금지했던 고려 당대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고려 말 사회적 혼란과 함께 지배층의 혼인 풍속이 문란해지면서 가능했던 일이다.

고향에서 이미 혼인한 지방 토호들이 개경의 중앙 귀족과 다시 혼인하는 일이 생겼다. 전자를 향처(鄕妻), 후자를 경처(京妻)라 불렀다. 실록에서는 이를 양처(兩妻)라 했다. 이성계의 두 부인도 그 같은 경우다. 신의왕후 한 씨는 향처, 신덕왕후 강 씨는 경처였던 셈이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으로 향처였던 한 씨(1337~1391)는 안천부원군 한경(韓卿)의 딸이다. 고려 충숙왕 때인 1337년 함경도 안변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때인 1351년 이성계와 혼인해 여섯 아들(진안대군 방우, 정종 방과,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태종 방원, 덕안대군 방연)과 두 딸(경신·경선공주)을 낳았다. 1391년(고려 공양왕 3)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392년 남편 이성계가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후 절비(節妃)로 추존됐다. 이어 1398년 아들 정종이 즉위하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숭됐다. 그녀의 능은 제릉(齊陵)으로 북한 개성에 있다.

이성계는 고려의 무장으로 원나라, 왜구, 홍건적, 여진족 등을 물리쳐 수많은 공을 세우면서 개경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상산부원군 강윤성(康允成)의 딸을 두 번째 부인이자 경처로 맞아들였다. 영흥 출신으로서 개경에 이렇다 할 기반이 없던 이성계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개경 권문세가의 딸과 정략혼인을 한 것이다. 

이후 강 씨와 그녀의 집안은 중앙 정계에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과 딸 하나(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던 때 태조의 향처 한 씨는 이미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강 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현비 顯妃)로 책봉됐다.

 

태조 이성계 내조자이자 동지 신덕왕후

강 씨는 가문을 배경으로 개경에서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줬다. 이성계의 내조자인 동시에 정치적 동지로 사실상 개국 공신이었다. 조선 개국 직후 1392년(태조 1) 8월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했다. 남편 태조와 개국 공신 정도전, 남은 등의 지지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러나 얼마 후 현비는 갑자기 병이 들어 1396년(태조 5) 8월 세상을 떠났다.

현비 강 씨가 죽자 태조는 그녀의 시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로,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했다. 태조는 정릉의 처음 후보지였던 도성 밖 안암동(安巖洞)과 행주(幸州)에 행차해 능지를 직접 둘러봤다. 그러나 안암동은 파보니 물이 나오고, 행주도 서운관(書雲觀) 관리들 간 의견이 엇갈려 두 곳 모두 포기했다. 도성 안 취현방(聚賢坊) 북쪽 언덕(현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을 능지로 최종결정했다. 신덕왕후는 죽은 이듬해인 1397년 1월 3일(음) 그곳 정릉에 장사지냈다. 지금의 정동(貞洞)이란 지명은 바로 그 정릉이 있던 곳이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태조는 정릉을 조성하면서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마련해뒀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둔 능이다. 그러나 훗날 태조가 죽자 태종은 이를 무시하고 부왕을 당시 경기도 양주 검암촌(현 동구릉 지역) 건원릉(健元陵)에 장사지낸다.

신덕왕후의 죽음에 상심한 이성계는 1397년 정릉 동쪽에 원찰(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그가 절을 세운 것은 아침·저녁으로 향화(香火)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환관 김사행이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절을 꾸몄다. 이때 세워진 흥천사는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터로 옮겨졌다. 1794년(정조 18) 다시 현재의 위치(성북구 돈암동)로 옮겨 짓고 이름을 ‘새 흥천사’란 뜻의 신흥사(新興寺)라 했다가 1865년(고종 2) 원래의 흥천사로 또 바꿨다.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의 정릉은 조선 왕실 최초의 능이다. 태조가 공을 들여 조성했지만, 몇 년 후 이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르고 부왕 태조가 죽자 왕후와 능의 위상은 바뀐다.

태조는 현비 강 씨의 아들로 이복동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몇 해 후 현비가 죽자, 방원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 씨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을 죽인다. 그해 태조는 방원의 동복형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1400년 동복형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방원은 세자가 됐다. 방원은 그해 정종의 양위로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이후 태종의 신덕왕후 흔적 지우기 작업이 시작된다.

 

봉분 없애고 석물은 돌다리 만들때 사용

태종은 우선 1403년(태종 3) 정릉의 원찰 흥천사의 밭과 노비를 줄인다. 이어 1406년(태종 6)에는 도성 안에 있는 정릉의 경계가 너무 넓다는 이유로 능에서 100보(步) 떨어진 곳에는 사람들이 집을 짓도록 허락한다. 그러자 당시 세도가들이 다퉈 좋은 땅을 점령했다. 특히 좌의정 하윤(河崙)은 사위들과 함께 능 주변 땅을 선점해 버렸다.

1408년(태종 8) 부왕 태조가 죽었다. 이듬해 태종은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절치 않고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와도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라’ 명했다. 정릉은 사을한(沙乙閑, 현 성북구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천장됐다. 이와 함께, 아침·저녁과 매달 초하루·보름에 지내던 제사도 봄·가을인 음력 2월과 8월, 그리고 이름이 있는 날(有名日)에만 최고위직이 아닌 2품관을 보내 지내게 한다.

태종은 같은 해 태평관(太平館)의 북루를 새로 짓고 관사를 개축했다. 이때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 누각을 짓도록 하는 한편, 정릉의 석물을 공사에 쓰도록 한다. 그뿐만 아니라 ‘능의 봉분은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石人)은 땅에 묻으라’고 명한다.

청계천 광통교에 쓰인 거꾸로 놓인 정릉 병풍석
청계천 광통교에 쓰인 거꾸로 놓인 정릉 병풍석
청계천 광통교
청계천 광통교

1410년(태종 10) 홍수가 나 흙으로 만든 청계천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졌다. 돌다리로 새로 만들 때 그간 파묻어놓았던 정릉의 옛 석물을 사용하게 한다. 광통교는 당시 도성 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이자 가장 붐비는 다리였다. 태종은 신덕왕후 구릉의 석물들을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한 것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의 미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한 대목이다. 

그 후 1416년(태종 16) 태종은 신덕왕후 강 씨가 과연 자신의 계모가 맞느냐고 신하들에게 묻는다. 그러자 좌의정 유정현이 “(강씨가 두 번째 부인이 된) 그때는 신의왕후(첫 번째 부인)가 살아있었으니, 어찌 계모라 하겠느냐”고 답한다. 그러자 태종은 “나는 정릉(신덕왕후)에 갚아야 할 은혜와 의리가 없지만 부왕이 애지중지하시던 의리를 생각해 어머니처럼 제사 지내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강 씨는 자신의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첩(후궁)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부묘(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하지 않았다. 태종이 앞서 1408년 죽은 태조의 신주를 태묘(종묘)에 모시고, 3년 후에는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신주도 부묘했던 것과는 달리 대접한 것이다. 

정릉 정자각
정릉 정자각

 

1418년(세종 즉위년)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즉위했다. 그는 ‘신덕왕후의 제사를 나라에서 행함은 옳지 않으므로 그녀의 족친들에게 맡기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상왕으로 살아있던 아버지 태종의 눈치를 본 것이리라. 

그 후 신덕왕후는 1669년(현종 10) 송시열 등의 주청에 따라 왕후로 복위됐고 신주가 종묘에 부묘됐다. 사실상 민묘(民墓)나 다름없던 정릉도 이때 다시 능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하게 됐다. 

한편, 훗날 대한제국 때인 1899년(광무 3) 고종에 의해 태조가 황제(고황제 高皇帝)로 추존되면서, 신의ㆍ신덕 두 왕후도 황후(고황후 高皇后)로 함께 추존됐다.

정릉은 조선왕릉의 일반적인 양식과는 달리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어로가 직선이 아니라 ㄱ자로 꺾여 있다. 도성 안에서 옮겨올 당시 비좁았던 능지의 여건에 따른 것이다. 능침의 석물 중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敲石)만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조성된 것이다. 

원통이 아니라 사각기둥 모양의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왕릉의 석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 진입공간의 금천교는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 조형 기술을 잘 보여준다. 재실 양옆, 보호수로 지정돼있는 느티나무도 늠름하고 멋들어졌다.

정릉이 도성 밖으로 쫓겨난 지 260년이 지난 1669년, 현종이 신덕왕후의 능침을 다시 봉하고 제사를 올렸다. 이때 정릉 일대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백성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통함을 씻어주는 세원우(洗冤雨)라고 했다(현종개수실록, 현종대왕 행장). 330여 년이 흐른 2003~2005년, 복개됐던 청계천이 복원될 때 광통교 아래에서는 거꾸로 세운 병풍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덕왕후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녀와 태종 방원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오늘날 정릉 금천교와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심하기만 하다. 태종의 증오와 신덕왕후의 원한, 그리고 세원우와 병풍석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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