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공동주택 민주주의, 무너지는 아파트 공동체
'민원표적' 입대의 회장 관리소장 수난시대
현장르포 - 달려간다 <6>

 

서울 강남구 A아파트는 지난해 여름, 관할구청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공문 한 통을 받았다. 해당 아파트에 대한 민원이 들어왔으니 실태조사를 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공무원과 전문위원 등으로 구성된 조사관 3명이 단지를 방문해 관리현황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실태조사를 마치고 몇 달이 지난 11월 중순경 ‘2019년 공동주택 민원조사 공동주택관리법 위반 과태료 사전통지 및 과태료 자진납부 안내’란 긴 제목의 공문이 날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공동주택관리법 제29조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주체는 주요시설을 신설하는 등 관리여건상 필요해 3년이 경과하기 전에 장기수선계획을 조정할 수 있다’ 규정위반으로 ‘공동주택관리법 제102조 제3항 제10호’ 의거 과태료 200만원을 부과할 예정’이란 것이었다. 또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100조 별표9에 의거 하나의 행위가 2 이상의 질서위반행위에 해당하거나 2 이상의 질서위반행위가 경합하는 경우에는 그 위반행위 중 가장 중한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과태료 부과예정’ 공문은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주체인 위탁관리업체에 똑같이 전달됐다. 과태료도 각 200만원씩이었다.
사태의 발단은 3년 전인 지난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이 아파트는 ‘단지 내 벤치, 파고라 교체공사 등’을 시행했다. 관할구청의 노후시설 개선비용도 지원받았다.
문제는 장기수선계획상 공사시점이 아닌 시기에 공사를 진행한 것. 법규정을 모를 리 없는 입대의와 관리주체는 이를 왜 어기게 된 것일까?
8개동 1,100여 가구가 입주한 이 아파트의 사용검사일은 1992년 10월. 지어진 지 28년차에 접어든 노후아파트다. 강남의 노른자위에 위치하며 지하철역도 가까운 역세권 인기 아파트지만, 건물과 시설이 낡고, 주차장 면적도 비좁아 건축당시와 달리 지금은 입주민의 80%가 세입자로 구성돼 있다. 게다가 중간에 집주인이 여러 번 바뀐 가구가 많다 보니 소유자의 연락처는커녕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노후한 설비와 시설물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빗물이 새고, 펌프가 멈춰서며, 오수관이 터지는 등 사람으로 치면 심장질환과 동맥경화에 관절염, 호흡곤란, 소화기질환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중환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결국 법대로 하려면-별 문제가 없는 새 아파트와 달리-시시때때로 장기수선계획을 조정해야 할 판이다. 장기수선계획을 수시 조정하려면 입주자, 즉 소유자의 동의가 필수인데, 이 아파트처럼 집주인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엔 연락할 길이 막막하다.
벤치는 다리가 삭아서 주저앉아 버리기 직전이고, 파고라 지붕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선 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작스러운 실태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구청은 불시 조사이유를 ‘민원’ 때문이라고 했다. 민원을 제기한 사람의 신분은 ‘당연히’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입대의와 관리사무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관리업무를 따지고 들며 동대표들과 관리사무소장을 괴롭혀 온 인물이었다. 입대의와 관리직원들 입장에선 정당한 문제제기가 아닌, 회장과 동대표 그리고 관리사무소장을 처벌받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지금 장기수선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외부 소유자 파악에 나선 상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긴급공사를 요하는, 크고 작은 설비사고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입대의와 관리사무소는 아주 큰 위험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돈 쓰는 공사는 하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집주인들의 서면동의서를 받자니 하세월이고, 공사를 강행하자니 법규정의 맹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악의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관계기관에 신고할까봐 무섭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장기수선제도, 이현령비현령 식의 불합리한 법규정, 그리고 제도와 관리업무의 빈틈을 파고드는 악성민원까지.
이 아파트에 대한 과태료 부과는 당사자들의 이의신청에 따라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이송된 상태. 결과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는 사이 입주민의 안전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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